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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모음 Jan 21. 202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전남친 단골 카페에서

헤어지고 친구로 남기도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지고 나오는 길, 조제에게서 도망쳤다며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식사를 하러 가는 길, 갑자기 차도 한 편에서 주저앉아 울어버린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완전히 무너져 대성통곡을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에서 가장 가슴 절절한 장면이다. 


헤어지고 친구로 남기도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다.



과연 웃으며 이별을 할 수 있을까? 경험해봤기에 말할 수 있다. 가능하다. 나는 그와의 마지막을 슬프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만나는 동안 좋았으면 됐어. 울고 싶지 않아. 웃으면서 헤어지자." 당시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지쳐 있었다. 연애를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 서로에게서 도망치는 이유였다. 그와 나는 눈가에 물기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3년의 연애는 그렇게 잘 가, 라는 인사와 끝이 났다. 연애의 끝은 언제나 너덜너덜함 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눈물 콧물이나 욕설 같은 것이 낄 자리가 없는 끝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날 카페 창 밖으로는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년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해놓고, 3년 동안 한 번을 제대로 꽃구경을 가본 적이 없었다. 늘 만날 시기를 놓쳐서, 몇 그루 남지 않은 초라한 벚꽃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곤 했었다. 이별하는 날에야, 만개한 벚꽃나무를 같이 보게 될 줄이야.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했고 동료들과 밥을 먹었고,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셨고, 웃고 떠들었고, 늦은 시간 집에 왔다. 매일과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연애한 기억이 애당초 없던 것만 같았다. 그와 나는 겹치는 친구도 없었고, 일하는 분야도 달랐다. 사는 지역도 달라서, 주말에 길가다 동네에서 마주칠 가능성은 벼락 맞을 확률과도 같았다. 진짜 '완전한 이별'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지 일주일쯤 뒤였나. 우리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그의 집 앞 카페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아르바이트생은 해맑게 말했다. 지난달에 넣어둔 명함 이벤트에 내가 뽑혔다고. 평소 그 카페에 가면 군침을 흘리게 만들던 리미티드 에디션 초코 케익이 이벤트 당첨 선물이었다. 전화를 건 쪽은 이벤트 기념으로 즉석사진을 하나 찍을 거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 사진은 한 달간 커피숍 한쪽 게시판에 꽂혀 있을 거라나. "이달의 이벤트 당첨자", 뭐 그런 거였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개그 필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풉 웃음이 터졌다. 카페는 그의 단골 가게였다. 이제 막 헤어진 전여친의 사진이 단골 가게의 게시판에 떡하니 걸려있다니. 평소와 같이 카페에 갔다가 내 사진을 마주하고 식겁할 그를 생각하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급히 전화를 끊었다. 정확한 변명의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정이 생겨 그 가게는 더 이상 못 갈 것 같다 그런 식의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운이 없다." 명함 이벤트에 적어냈던 한 줄 응모 문구였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운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난 후, 한참을 피식피식 웃었다. 이 웃긴 상황을 그에게 전화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오늘 네 단골 카페, H에서 연락 왔어. 나한테 이벤트 당첨되었으니까 즉석사진 하나 찍고 케익 받아가래. 그 사진은 카페 한쪽 게시판에 한 달간 걸어둘 거고. 내가 그때 그 이벤트 응모할 때 썼던 문구 생각나? '나는 언제나 운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진짜 운이 없네. 왜 하필 우리 헤어지고 난 후에 이런 연락이 오는 거래.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하지만 그 말은 전하진 못 했다. 그와 나는 이제 그런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사이가 아니니까. 순간, 진짜 이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에 밥을 먹었는지 라면을 먹었는지, 회사에서 민지와 대화를 했던지 예나와 대화를 했던지, 식후 커피로는 아메리카노를 먹었는지 라떼를 먹었는지. 그런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던 사람. 그랬던 존재에게서 도망쳐버렸단 것이 실감 났다. 


전남친 단골 카페 이벤트 당첨 사건, 그건 이제 나 혼자만 간직할 웃픈 순간이었다. 속살이 보이는 상처에 소금을 친 것처럼 마음 한 편에서 짠 기운이 올라왔다. 고요한 집 안에서 천장을 보고 가만히 누워있다가, 웃었다. 또 웃다가, 울었다. 분명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울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  


헤어지고 친구로 남는 사이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아마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다




[ 인생은 오마쥬 ]

영화 속 한 장면이 뜻하지 않게 내 인생에서 리플레이될 때가 있다.

*'인생은 오마쥬'는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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