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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교육쟁이 Jan 06. 2020

‘두 개의 성’이라는 함정

2019년 7월, 한 청소년성문화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항의하는 사람들의 손엔 ‘내 아이 죽이는 왜곡된 성교육 규탄한다’, ‘페미니즘, 성평등 교육 OUT’이라는 피켓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센터의 성교육이 불온하고 불건강한 젠더 이데올로기 독약을 주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발단이 된 교육 내용을 살펴보자.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사가 “성별은 남자와 여자 단 두 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여러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 상황을 직접 목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대화가 더 오고갔는지 알 순 없다. 하지만 아마도 강사는 이 세상엔 남자와 여자 두 개의 성별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기 때문에 남녀 두 성별밖에 없다는 생각은 그들에 대한 차별이 될 수 있음을 설명했을 것이다. 또, 아마도 강사는 성이 여러 개가 있다는 걸 강조하기 보단, 단 두 개만 있다는 인식이 성별 이분법 안에 내 한계를 가둬둘 수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별 안에 여러분의 가능성을 막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면 나 역시 그렇게 교육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맞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간성, intersex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선천적으로 성선(난소, 정소)이나 성염색체, 성호르몬, 성기 가운데 하나 또는 다수가 일반적인 성별 구분과 들어맞지 않는 않은 특징을 갖고 태어난다. 생식기가 겹친 외형적인 양상뿐만 아니라, 몸안에 난소와 정소가 같이 있는 사례, 염색체는 여성인데 성기는 남성인 사례 등 양상은 다양하다. 출생 직후 간성임을 알 수 있지만 2차 성징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신체적인 특징은 남성인데 xx염색체를 가졌을 경우(혹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의 염색체를 따로 검사하지 않는다면 평생 간성인지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문제는 많은 간성인은 타인에 의해 신체 일부가 개조되거나 의도하지 않은 지정성별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 출생신고 서식에는 성별구분이 여성과 남성 딱 두 가지로 나눠져 있다. 불상으로는 체크할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간성임을 양육자가 인지했을 경우 보통의 양육자들은 아이의 성별을 정해 수술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은 위험하고 부작용 또한 크다는 점이다. 수술은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 있고, 평생 약과 수술이라는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육자와 의사가 판단해 만든 성별이 간성인이 인지하게 될 성별정체성과 다를 수 있다. 수술로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린다고 해도 큰 수술을 또 다시 감당해야 한다.


이 세상은 남성과 여성 단 두 개의 성으로 이뤄져 있음을 근거로 삼으며 간성을 질병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간성은 질병이니 의학적 수술을 통해 성기를 교정해야 한다. 하지만 간성으로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고 통증도 없으며 따라서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는 필요가 없는데 굳이 신체 일부분을 개조해 부작용과 위험함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질병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간성인의 신체 자율권을 앗아버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선택은 본인이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선택은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등 떠밀어져서 안 된다. 이렇게 봤을 때, 간성인에 대한 의학적 개입이야 말로 왜곡된 성가치관에 의해 발생하는 불온한 폭력일 것이다. 


논란이 된 청소년성교육센터는 결국 이 세상엔 나와 다른 존재가 있으며, 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폭력에 노출되고 있음을 교육 내용으로 다룬 것이다. 즉 우리 사회 정상성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 교육이다.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우리가 무엇이 평등이며 공생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 어째서 독약과도 같은지 이해할 수 없다. 


또 하나 고민해야 하는 건, 성별 이분법이 갖는 성별 규범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별 이분법은 다리 사이의 그것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정체성으로 설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기준으로 활용되어 왔다. 문제는 성기로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각자가 가진 성기는 그 사람의 성격도, 신체적인 특징도, 각종 성향 및 성적 지향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각 성별의 보편적인 특징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늘 봐 왔다. 목소리가 얇은 남자,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유방 절개 수술을 한 여자, 정소에서 정자를 만들지 못하는 남자 등등. 그런데 과연 나 역시 내 성기의 보편적인 신체적‧성격적‧성향적 특징이라 불리는 것에 하나도 빠짐없이 맞아 떨어지는 사람일까? 놀랍게도 나는 그런 사람을 단 한 명도 본적이 없다. 이렇게 봤을 때, 성별 이분법과 정상성의 기준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무엇이 나다운 것이며 나다움은 어떻게 존중받을 것인지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나의 다양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닐까.


내 경험상 성교육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청소년은 생각보다 반감 없이 받아들인다. 폭력의 피해자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하고, 성별로 구획되지 않는 나다움을 인정받아야 한다며 공감하기도 했다. 견디지 못하는 건 항상 성인들이었다. 


논란이 됐던 저 사건은 해당 청소년성문화센터 대표와 그날 교육을 했던 실무자가 사과를 하며 일단락되었다. 센터는 그들의 민원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 사건은 그 날 교육을 받았던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엔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상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줬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이 평등과 공존, 나다움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학습시켰을 거라고. 안타깝지만 그것이 우리 성교육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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