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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호 Mar 13. 2021

어서 오시게,호 선생

돌아온 산중호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물” 하면 어떤 동물이 떠오르냐는 질문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를 꼽지 않을까 싶다. 호랑이는 우리나라 건국설화에도 등장할 만큼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동물이다.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가 모두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호랑이가 우리네 삶과 참 밀접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아서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호담국’이라고 불렀을 정도였고, 오래된 그림들에서도 호랑이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 이처럼, 호랑이는 우리나라의 건국설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최근 2018년에 개최되었던 평창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수호랑'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존재로 우리와 함께 해 왔다.

 호랑이는 고양잇과 동물 중에서도 최강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맹수 중의 맹수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했던 한국 호랑이는 몸길이가 수컷 기준 2.9m – 3.9m이며, 평균 몸무게는 180kg – 300kg 정도인데, 가장 큰 개체로는 350kg 이 넘는 호랑이가 발견된 적도 있다. 호랑이는 이런 거대한 몸으로도 최고 65km/h로 달릴 수 있으며, 앞발로 후려치는 힘은 800kg에 달하는 데다가 도움닫기 없이 3m가 넘는 점프가 가능하다. 10m가 넘는 높은 나무도 눈 깜짝할 새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나무도 잘 타고, 심지어 고양잇과 동물들이 극혐 하는 물도 좋아하니, 그야말로 최강의 생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말에 ‘호환마마’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마마'는 천연두를 이르는 말이고, ‘호환’은 호랑이로 인해 생기는 재난을 이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조상들은 호랑이에게 수많은 인명 및 재산피해를 입었다. 고려시대 공양왕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으나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심해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가 총 940여 군데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특히, 조선왕조를 통틀어서 총 3번이나 왕이 살고 있는 경복궁 내부에 호랑이가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보통 호랑이는 깊은 숲 속에 살기 때문에 사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고, 설사 사람을 마주친다고 해도 그냥 피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 호랑이에게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영조시대부터 호랑이로 인한 인명피해가 급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조선 후기의 성군으로 불리며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군주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한반도의 70% 이상은 산지인데 반해 조선은 농업 중심의 국가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려면 농사를 지을 농토를 개척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삼림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호랑이의 서식지를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호랑이는 넓은 거리를 배회하면서 살기 때문에 사람과 마주칠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과도한 삼림 개척으로 인해 호랑이의 먹잇감인 노루나 사슴, 멧돼지들의 서식지가 좁아졌고 먹잇감이 줄어든 호랑이가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먹이를 찾아 내려오게 된 것이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점점 커지자 조정에서는 호랑이를 잡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특공대의 이름이 "착호갑사"이다. 착호갑사들은 뛰어난 무술 실력과 담력을 겸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아무래도 호랑이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담력은 필수였다. 현대에 와서 밝혀진 바로는, 호랑이가 포효할 때 나오는 저주파가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의 근육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즉,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다가 호랑이의 포효 한 번에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버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한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다. 당시 호랑이 가죽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양반들 혹은 왕족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가격도 매우 비쌌다. 여기에 더해서 조선왕실은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벗겨오는 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해 줬기 때문에 수많은 착호갑사들이 총 한 자루 들쳐 메고 산으로 떠났다. 국가에서 호랑이 사냥을 장려하다 보니 호랑이의 개체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호랑이는 조선시대 내내 한반도에서 멸종하지 않았다. 비록 조선시대에 조총이 도입되었다고는 하지만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서는 착호인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의 호랑이 사냥의 목적은 호랑이를 멸종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로 인해 농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들은 호랑이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들의 멸종이 아닌 적절한 상생을 원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일제시대의 "해수구제 정책"이다. 일본 열도 가장 최상위 포식자 늑대이다. 물론, 늑대도 뛰어난 신체를 가진 강력한 맹수이지만 한국의 호랑이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 일제는 한반도의 호랑이를 사냥함으로써 자신들이 한민족보다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호랑이나 표범, 곰 등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한국인들을 도와주겠다는 핑계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짐승들을 무분별하게 남획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 연표에는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인해 한국 호랑이는 97 마리, 표범은 무려 624마리가 남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호랑이와 표범이 죽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더 이상 호랑이와 표범이 살지 않게 되었고 우리 민족이 영물로 여기던 호랑이는 한반도를 떠나 연해주 지역으로 서식지를 옮기게 된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서 일제시대의 정책 중에서 해수구제 정책은 잘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봤다. 그 글에 따르면 가축과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와 표범을 일제가 몰아냄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호랑이와 표범으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읽고 참 안타까웠다. 호랑이와 표범은 한반도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주로 사슴이나 노루, 소, 멧돼지와 같은 우제류(발굽동물)를 먹고 산다. 즉, 이들의 개체수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해준다. 하지만 최상위 포식자의 부재는 생태계의 불균형을 야기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생태계의 불균형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호랑이 사냥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21세기 현재에는 생태계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와 표범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에나 있었던 인간 중심 사고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 중심의 사고관을 벗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일제의 맹수 사냥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위한 선행이 아닌,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철저히 짓밟으려는 잔혹한 만행이라는 것이다. 특히, 호랑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신으로 모셨던 영물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 민족이 호랑이와 같이 용맹하고 강인한 민족이라고 믿었고, 호랑이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아왔다. 호랑이는 곧 우리 민족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단군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호랑이를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해 왔지만 현재 정작 한반도에는 우리가 우리 민족과 동일시해 오던 호랑이는 씨가 말랐다. 우리는 호랑이 없는 호랑이 민족이 되었다. 그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리나라를 침략한 침략자들에 의해 강제로. 일제가 노린 것은 안정적인 농작물의 수급과 농부들의 안전을 핑계 삼아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사냥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짓밟으려 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호랑이 사냥으로 인해 얻게 된 호랑이 가죽과 뼈, 고기 등을 팔아서 이득을 취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의 정신을 짓밟은 침략자들의 만행을 잘했다고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참 씁쓸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일제의 만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본의 호랑이 사냥은 임진왜란 시대에도 있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에 한반도를 쳐들어온 일본 장수 중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이 아끼던 시동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복수를 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당시 일본군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가토 기요마사는 병사들을 창과 칼로 무장시킨 채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이는 일본군의 용맹함을 과시하기에 칼과 창이 더욱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총으로 사냥하는 것보다 칼과 창으로 사냥하는 것이 더욱 잔인하게 복수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칼과 창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이 개인의 복수심에 의한 것인 반면,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짓밟기 위한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심지어 일본의 한 기업가는 호랑이 사냥꾼을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한반도의 호랑이를 사냥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이다. 선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그는 1917년 조선으로 건너와 호랑이 사냥에 나선다. 그는 당시 호랑이 사냥의 경험이 있는 조선 착호군들을 고용하여 약 한 달 동안 호랑이를  사냥하러 나섰다. 그 결과, 호랑이 2마리와 수호 (호랑이와 표범의 사이에서 난 새끼) 1마리를 포획했다. 수호는 표범같이 생겼지만 무늬가 다르고 꼬리도 일반 표범에 비해 두껍다. 매우 희귀한 동물이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동물인데 일본인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것이 매우 뼈아프다.

 야마모토의 호랑이 사냥은 단순히 한 갑부의 여흥이 아니었다. 그는 1917년 12월 20일 오후 5시,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연회를 개최했고, 정재계 인물들 약 200여 명을 초대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아주 희귀한 고기를 대접한다. 바로 호랑이 스테이크이다. 그는 연회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만, 다이쇼 시대의 저희들은 일본의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가토 기요마사를 지칭한다. 자신이 아끼는 시동을 죽인 호랑이를 사냥함으로써 시동의 복수를 해줬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일화를 말한다. 야마모토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다음 문장이다. 그들은 조선의 영토가 아닌 일본의 영토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했다. 1917년이면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시기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인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것은 조선인들이 신성하게 모시고 스스로를 호랑이와 같이 용맹한 민족이라고 믿는 대상을 무참히 사냥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강하고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 해수구제 정책이라는 명목 하에 호랑이뿐만 아니라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을 꾸준히 학살해왔다. 여기에 더해, 민간에서도 호랑이를 사냥하고 그 고기를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에게 대접했다는 것은 조선인들과 조선의 문화, 조선의 정신을 잘근잘근 짓밟는 야만적이고 잔학 무도한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를 이룬 국가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자신들이 서구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매우 강했었다. 그들은 근대화의 상징인 이발과 양복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이 문명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잔인하고 무식한 행동들은 그들이 여전히 야만적인 문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되어버렸다. 




 일본인들이 닥치는 대로 호랑이를 사냥하자 한반도의 호랑이들은 일본군을 피해 서식지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호랑이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북쪽으로 향했고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근처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 양국은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지정하여 호랑이의 사냥을 금지하고 호랑이가 새로운 터전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호랑이의 개채수는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덧 서식지가 포화상태에 이를 만큼 호랑이가 많아졌다. 그렇다 보니 서식지를 이탈하는 호랑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들 중 일부는 북한 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의 호랑이가 다시 한반도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도 간헐적으로 호랑이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발견되거나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목격담이 있긴 하지만 호랑이의 존재가 정식으로 보고된 바는 없다. 

 호랑이의 귀향을 두고 다양한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혹자들은 호랑이로 인해 인간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호랑이의 귀향을 환영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호랑이의 귀향을 환영하고 그들과의 공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여러 가지 과학 기술을 통해 야생동물들을 추적하고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호랑이의 서식지를 보호하고 인간과 그들이 마주치지 않도록 관리가 가능할 것이다. 혹은 호랑이를 위한 생태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 하다. 실제로 경북 봉화군에 위치한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에는 호랑이 생태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호랑이 한 마리의 최대 서식 영역은 1,200 km2 이기 때문에 지금의 생태공원은 터무니없이 작다. 그렇다고 호랑이를 야생으로 방사하여 조사하기에는 조사할 영역이 너무나도 광범위하여 부담될 수밖에 없다. 또한, 밀렵과 같은 위험요소로부터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판다를, 호주는 코알라와 캥거루, 러시아는 불곰을 자국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동물들을 국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스스로 호랑이의 민족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호랑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활동반경이 넓은 야생 호랑이를 보호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등 수많은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해서 호랑이를 다시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돌아온 호랑이가 우리의 빠른 대책을 촉구하는 것만 같다. 



< 참고 >

정호기 -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 엔도 키미오

역사 e 3권 - EBS 역사채널 e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TV (백두범 돌아온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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