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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Mar 25. 2024

나만을 위한 특별 콘서트

코로나 시대를 뚫고 올 것이 왔다.

학부모 참관 수업.

2년 동안 학부모 참관 수업을 영상으로 대체했다는데 드디어 대면 수업이 열린 것이다.

아이가 책가방에 넣어 온 유인물을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 뒤. 9시부터 도서관 수업, 9시 50분부터 본 수업. 마음이 막 떨렸다.

"아, 엄마 무슨 옷 입고 가지. 아무래도 드레스를 한 벌 사야 하지 않나. 격식 있는 곳에 가는데 엄마가 그 정도는 입어줘야지. 머리도 빠마하고 가야겠다."

하고 슬쩍 농을 치니 첫째는 그 얘길 심각하게 듣고 난리가 났다.

"엄마, 제발 빠마하지 마. 더 못생겨 보여. 그냥 머리만 잘 감고 오면 돼. 머리 안 감고 모자 쓰고 오지 말고. 그리고 드레스는 입지 마. 다른 엄마들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바지에 티셔츠 입고 온댔어. 제발 드레스 입지 마."

내가 모자를 자주 쓰긴 하지만 머리를 안 감아서만은 아닌데... 멋 부렸던 건데... 아이가 머리나 제대로 감고 오라 하니 웃음이 킬킬 났다. 그래서 계속 놀렸다.

"아, 안돼. 엄마는 드레스 입고 가야겠어. 지금 당장 화사한 색깔로 한 벌 사야겠다. 엄마는 초라하게는 너네 학교에 갈 수 없어. 화려하게 차리고 갈 거야."

하고 핸드폰으로 쇼핑하는 시늉을 하자 첫째가 폰을 팍 뺏으면서 어금니 꽉 물고 한마디 했다.

"그냥. 므리만. 제대로. 깜고. 오라그."


아닌 게 아니라 프리랜서로 오래 지내다 보니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을만한 옷이 마땅치 않았다. 어떻게 갈지 고심하다 처녀시절 입었던 트렌치코트가 좀 멀끔해 보여 다려 놓고, 미용실 가서 머리도 다듬었다. 바지는 정장 같은 게 없어서 일자 핏 청바지를 깨끗이 빨아 구김 없이 말려 뒀다. 그 김에 신발도 베이킹소다로 빡빡 문지르고 볕에 쨍쨍 말려 하얗게 만들어놨다.

수업은 애가 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떨리는지. 왜 그럴까 마음을 잘 되짚어 보니, 나는 뭔가를 과하게 기대하고 있는 거였다. 내 애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는 걸 보고 싶어서, 친구들하고 잘 지내는 걸 보고 싶어서 이렇게 안달이 나는 거였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자. 얘는 집에서 하던 대로 학교에서 할 거니까 아무 기대를 하지 말자 다짐을 했다.


드디어 수업 참관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애가 시킨 대로 머리 싹싹 감고, 평소 안 하던 드라이도 하고, 톤업 크림까지 발랐다. 첫째는 드레스 입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먼저 학교로 떠났다. 나는 다리 달달 떨며 8시 반이 되길 기다렸다가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2년 동안 공개수업이 안 열렸으니 보호자들이 평소보다 많이 왔단다. 다들 정장에 명품 가방에 잘 차려 입고 왔다. 괜히 눈치가 보여 트렌치코트로 청바지 부분이 잘 안보이게 여몄다.


1교시는 도서관 수업. 도서관 뒤에 미리 앉아 있으니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00이 엄마죠. 다 알아요. 얼굴 똑같이 생겼다. 같은 이야기들을 와글와글 해주었다. 씨익.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대화하는 중에 내 애가 들어왔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오지 않은 걸 보고 안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지정된 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수업 끝나기 한 10분 전엔 결국 긴장이 풀어졌는지 옆 친구 머리를 땋아줬다가 지우개를 떨어뜨렸다가 딴짓을 좀 하긴 했지만.

2교시는 교실 수업. 이제 본 게임이다. 지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에 뭘 하는지, 자리는 어딘지, 사물함은 어떻게 쓰는지 알아볼 차례. 첫째 담임 선생님은 아주 꼼꼼하고 노련한 분이라 교실 꾸밈부터 달랐다. 아이들이 헷갈려하는 받침 글자들을 창문마다 붙여두셨고, 숫자 놀이 교구들도 차곡차곡 라벨링한 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부모님들이 와서 교실 뒤에 서있자 흥분한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난리였는데 선생님이 어떤 노래(로 마법의 노래였다)를 부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다 따라 부르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정돈됐다. 안 그래도 1학년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날 정말 엎드려 절하면서 수업 들을 뻔했다. 선생님은 진정 능력자였다. 어떻게 이 천방지축들을 단숨에 진정시키실 수 있는지 존경스러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과장이 전혀 아니다).

40분이란 수업시간 동안 내 애는 일단 발표를 씩씩하게 잘하는 아이였다. 선생님 질문에 대답도 잘하고, 손 들고 자기 의견 말하는 것도 잘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집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했다. 오늘 수업은 세모 네모를 배우는 거였는데 선생님이 나눠주신 모양자를 빙빙 돌리다가 세 번이나 떨어뜨려 결국 압수당했다. 그리고 교실에서 유일하게 지우개가 없는 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 6번 정도 새로 챙겨준 지우개들을 모두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모르면서 해맑은... 뭐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첫째는.

다른 학부모들이 '집에서랑 학교서랑 애들이 완전 달라요~'이런 말을 해주곤 해서 나는 내 자식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집에서도 맨날 지 물건 사방에 흩뿌려두고 못 찾고 하더니 학교에서도 아주 똑같았다. 학부모들이 뒤에 주르르 서 있든 말든 손 번쩍 들고 "선생님! 저 지우개 없어요. 지우개 빌려주세요."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어이없고 웃기고 그래서 고개 숙이고 흑끅흐크크그크크긐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참관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자기 사물함을 보여주는데 진짜... 모든 물건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바로 세워져 있거나 바구니에 담겨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바로 옆자리 친구 물건은 종류별로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겨있어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내가 사물함을 보고 결국 웃음을 못 참고 빵 터지자 얼른 물건을 치우면서 '나는 또 치우면 금방 치워'하곤 대충 물건을 바구니에 휘리릭 쌓았다. 그러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본다. 아. 웃기다. 그냥 다 웃기다. 참관수업 때 이렇게 광대 찢어지게 웃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오늘 덕분에 정말 좋은 구경 했어.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이따 집에 오면 피자 파티하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니까!"

하면서 아직 2시간 수업이 남은 애에게 손 흔들어주고 집으로 오는 내내 혼자 웃었다.


아.

정말 안심된다.

얘는 어디서든 자기 모습 그대로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첫째의 인생은 더 이상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지 인생 제멋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난 그저 걔 인생에 내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지 팔 흔들고 싶은 대로 흔들 수 있도록 공간만 잘 만들어주면 된다.

그날 저녁, 배우자에게 애 수업 참관한 이야기를 풀면서 피자 파티를 벌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장하다! 너의 초딩 인생.


참관 수업 다음날, 후문에서 애 하교를 기다리며 학부모들이랑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다들 조금씩 속상한 구석이 있었나 보다. 애가 발표를 안 해서, 혹은 집중을 안 하고 계속 장난을 쳐서, 또는 너무 소극적으로 앉아만 있어서 마음이 괴로웠다는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나는 내 애 보느라 다른 애들은 못 봤는데 다들 1학년치곤 잘 앉아서 40분 수업을 듣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워낙 노련하시기도 했고 애들도 선생님 수업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또 부모 입장에선 자식 아쉬운 점만 보이기 마련이니까 다들 조금씩 속상했나보다. 나는 우리 집 애는 이번에 7번째 새 지우개를 들고 갔다고, 그런데 3일 만에 자기는 잃어버릴 예정이라고 미리 말했다고 우리 애 뒷담을 까줬다. 이런 분위기에 내 자식은 걱정 하나도 안 돼요, 같은 눈치 없는 소리나 하면 서로 맘만 상하니까.

그런데 사실은 걱정이 하나도 안 됐다. 나에겐 심금을 울리는, 지우개에 대해 내게만 얘기해 준 첫째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가 내게 말한 건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 새 지우개를 준 건 고마워. 안 잃어버리려고 노력은 할 건데 아마 3일 내로 잃어버릴 거야. 신경을 쓴다고 써도 그렇게 되더라고. 근데 그래도 새 지우개 더 안 줘도 돼. 내가 알아서 친구한테 구걸(!)해서 남은 학기 살아가면 되거든. 걱정 마."


푸하하하하하하. 그래.

난 너의 그런 점이 정말 존경스럽다. 네가 알아서 네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부분이 나에게 정말로 힘이 된다. 소심하고 불안한 나와 함께 살아 줘서 정말 고맙다. 너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쿨한 사람이야. 늘 너를 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배운다. 늘 고맙다. 진심으로 고오마워.


다음 참관수업은 내년에나 있을텐데, 너무 아쉽다. 참관 수업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신나는 나만을 위한 특별 콘서트였다. 고학년 되면 마음이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뭐. 이번엔 40분 수업 시간 내내 김연우 콘서트 온 것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감히 내년을 미리 기대해본다.

이놈이 또 날 얼마나 웃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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