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Apr 01. 2024

로또가 되면 바다로 간다

심심할 때마다  배우자와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

로또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금액별로 세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중 집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은 예산을 차지했다.

로또가 당첨되었을 시 얻을 '우리의 집'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아이 학교 근처에 매물로 나온 땅의 평당 시세를 알아보고, 대출이 얼마까지 나오는지 확인하고, 친환경 자재로 2층 건물을 지어 중정을 만들고 화장실 2개를 만들고 수입산 타일을 붙이고 대리석으로 아일랜드 식탁을 놓고 원목 서재장을 들이고 kcc시를 맞추는데 드는 예산안을 세세히 짜 볼 정도였다(엑셀로 정리해보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부지런도 병이다). '로또가 되면 지을 집' 예산안 작성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우리만의 유희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부동산 어플에 들어가 우리의 로또 금액에 걸맞은 집을 찾아보던 (놀이) 중, 마음에 팍 꽂히는 집이 올라왔다.

50평이 넘는 평수에 위치는 강변 바로 앞, 화장실 2개 올 리모델링, 아치형으로 벽 개조를 다 해서 새집 같은데 가격이 2억 8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층이었다! 그간 4층에 살면서 위층의 층간소음과 아래층의 항의(여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로 인해 적잖이 지친 터였다. 꿈에 그리던 집 장만이 갑자기 눈앞에 성큼 다가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있는 강변 산책로에 마음을 빼앗겼고 운동장같이 너른 거실에 가슴이 뛰었다. 무엇보다 애들이 아무리 뛰어도 잔소리할 필요가 없어진다! 할 일 없는 주말 아침에 킥보드 끌고 나가면 바로 자전거 공원이 나온다! 대박. 대박.


2억 8천은 그 집이 가진 컨디션에 비하면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끌어당길 수 있는 대출 금액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집 팔고 차 팔고 영혼 빼고 모든 걸 다 팔면 그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우리는 강변에 위치한 그 집을 사는 걸 포기했다.

나만 아는 단골 맛집이 있고 골목 골목까지 속속들이 환한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것, 애들 학교와 유치원과 학원까지 모조리 옮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나서도 내심 입맛이 썼다.

내가 며칠 동안 침울해하고 집 때문에 고심하는 걸 본 배우자가 오늘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그런데 있잖아, 내가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말이야... 사실 나는 로또 되어도 지금 사는 집에서 이사 가지 않을 생각이야. 차라리 여행을 가는 데에 돈을 쓰고 싶어. 우리가 사실 집에 오래 있진 않잖아."


그러게.

맨날 떠나고 싶다고, 세계일주하고 싶다고, 홍해 1년 살기 하고 싶다고 떠들어놓곤 정작 세상이 주입해 준 <내 집 마련>에 세뇌되어 집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줄 알았던 것이다. 따져보니 나에게 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생활을 해결할 정도의 안락함만 있으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내 집 마련의 실현 가능성이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에선 요원했으니까. 그런데 더 생각해 보니 그 가능성조차 정말 내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좋다고들 하는 형태의 집을 가지고 싶었던 마음은 진짜 내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에 '그리던 1층 강변의 집' 포기 소동을 겪으면서, 지금은 꿈이라도 세상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로또가 된다면- <홍해에서 다이방> 예산을 세세하게 짜는 게 배우자와 나 사이의 새로운 유희가 되었다. 엑셀 열고 새로운 Sheet 추가. 추가.


이번 생에서 내가 꾸는 가장 큰 꿈은 섬나라에서 다이빙 강사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핑도 배우고 모래밭에서 요가도 하고 매일 바다 일기를 쓰며 생을 보내고 싶다. 요통이 심해서 오래 앉지도 걷지도 못하는 나로선 언제나 물이 그립다.


최근 고등학생 시험기간이라 막판 스퍼트 강의를 몰아서 했는데, 피로가 가시질 않고 몸이 뭔가 이상하다-싶었는데 오늘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너무 아팠다. 문제는, 아픈데도 학생들 시험기간이라 수업을 쉴 수가 없다는 거였다.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하니 질염에 눈병에 온갖 병이 줄달아 왔다. 대상포진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과 가려움을 억누르면서 생각했다.


아.

생에 대한 걱정 없이 바다에 얼굴을 담그고 싶다. 더 기력이 쇠하기 전에. 더 많이 아프기 전에.


지금은 아이 양육과 각종 대출금에 꽁꽁 묶여 있지만 언젠가, 와, 이런 날이 내 생에 오는구나, 하며 꼼꼼히 상상했던 미래를 목도하고 싶다.


너무 낭창한 계획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진영작가는 l홈 스위트 홈]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일직선상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고. 시간은 발산한다고.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내가 열심히 상상하는 나의 어떤 모습은 멀리 떨어진 실존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한다. 초라한 내 어떤 조각을 벗어난, 다가오면 기꺼울 다른 나의 모습을.


거기엔 로또도 있고 집도 있고 바다도 있다.

이전 19화 나만을 위한 특별 콘서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