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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Mar 04. 2024

엄마 노릇 진짜 노잼

입을 벌릴 때마다 찌릿하니 아파 턱을 더듬어보니 심술 여드름이 몇 개 돋아나 있다.

오늘은 첫째 아이 개학 전날. 방학을 잘 버텨낸 내가 대견해서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어쩐지 자꾸 턱에 돋은 여드름처럼 심술이 나고 신경질이 뾰족이 솟는다.


방학 동안 애 데리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놀이공원, 박물관, 바다, 어린이 베이킹 체험장, 도서관, 도서관, 도서관... 오늘도 아침부터 도서관에 갔다가 푸린 케이크 만들기 체험 갔다가 저가 먹고 싶다 돈가스집에 가서 일일이 밥 떠먹이고 집에 돌아 왔다.


엄마가 저한테 잘하려고 노력하면 어느정도 맞장구를 쳐주면 좋겠는데 진짜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나갔다 오면 손 씻어라, 머리카락 뜯어먹지 마라, 손톱 물어뜯지 마라, 엄마 컴퓨터로 장난치지 마라 목이 쉬도록 말해도 내 목소리를 자체 음소거 처리해버린다. 어린이는 본인 마음에만 충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다. 당장 물장난을 치고 싶으면 내가 뭐라 해도 온 사방에 물을 튀겨버린다. 거실 바닥에 고구마칩 부스러기를 흘리며 돌아다닌다. 연필 뒤꼭지를 질겅질겅 씹으며 만화책만 읽는다.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것도 지겹다. 티브이에 나오는 못된 잔소리쟁이 엄마가 된 느낌이다. 자식 역할이 너무 부럽다. 남이 뭐라 하든 이렇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할 수 있다니.

인간이 아무리 이십 년 넘게 사회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지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발에 버석버석 밟히는 고구마 가루를 청소기로 미는데 울화가 치밀었다. 와. 엄마 노릇 진짜 노잼이다.



어제는 내가 사는 시골을 벗어나 차 타고 한 시간 가량 가야 하는 큰 병원 소아청소년과에 애를 데려갔었다. 학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과체중 판정을 받아 고민하던 차에,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애 엄마가 해준 조언을 듣고 성장 검사를 예약해둔 거다. 여자애는 초경 시작해버리면 답이 없다고, 7~8세 무렵에 몸무게가 확 늘면 성장 검사 꼭 해보라는 그 엄마 말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생각해보니 나도 초경이 빨랐다. 11살에 초경을 시작했으니 생리대 간수도 잘 못했다. 자주 갈아 줘야 하는데 뒤처리를 잘 못해서 골치를 썩었다.

하. 지금도 생리하는 거 괴롭고 싫은데. 애 만큼은 조금이라도 생리 늦춰주고 싶다는 생각에 석 달이나 기다려서 예약을 겨우 잡았다.

한 시간 운전해서 가서, 번호표 뽑고 오래 기다렸다 접수하고, 문진표를 작성하고, 천방지축 병원 복도를 뛰어다니는 애를 잡아서 손 사진을 찍고, 또 오래 기다렸다가 마침내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지금 성장이 또래보다 1~2년가량 빠르다는 거다. 체중이 1년 사이에 7kg 정도 늘었는데 왜 진작 경각심을 갖지 않았는지 스스로가 한심다. 왜 애가 달라는대로 먹을 걸 줬을까. 매일 운동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일단 호르몬 검사까지 해봐야 하니 피검사 예약하고 가시라는 안내를 받고 진료실을 나왔는데 맥이 탁 풀렸다.


나도 과체중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받아 왔고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을 정돈데. 얘는 8살에 식단관리를 시작해야 한다니.

첫째는 아토피가 심해서 빵이나 과자 같은 간식류는 일절 안 먹고 오직 밥만 먹는 밥 파인데. 야채도 잘 먹고 고기도 잘 먹는데. 매일 태권도장도 가고 물놀이도 하면서 운동 많이 하는데.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밥 더 먹고 싶다는 애 밥그릇 뺏는 거 진짜 못할 짓인데. 나 살쪘을 때 엄마가 밥 더 안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서운했는데.

그런 엄마 되기 싫다.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나를 보고 첫째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괜찮아, 엄마, 이제부터 좀 덜 먹으면 되지, 한다.

첫째 아기 때 아토피 판정받았을 때도 세상 무너진 것처럼 슬펐는데, 어제도 그만큼 슬펐다. 감정을 못 이겨 살짝 울먹이며 애를 붙들고 사과했다.

"엄마 아빠 때문에 네가 고생이다. 엄마 아빠가 다 통통니 어쩌냐. 이제부터라도 우리 많이 걷고, 밥은 한 그릇씩만 먹자."


평생 표준체중을 벗어난 삶을 살아온 나로선, 세상이 표준 체중을 넘는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슬프고 괴로웠다.


몸은 세상과 맞닿아있는 최전선이다. 몸이 얼마나 세상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지, 그 전투가 마음까지 얼마나 깊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너무 잘 알았다. 통통-퉁퉁을 오가는 여자에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입을 댄다. 내 애가 성조숙증이 올까 봐도 걱정이었지만 비만인이라 놀림 받고 상처받을까 봐 더 걱정이었다.


세상은 다양한 몸을 수용하지 못한다. 뚱뚱한 여자는 쉽게 놀림거리가 되고 쉽게 게으른 사람이 된다. 내가 먹는 것의 결과물이 내 몸인 건 아닌데. 내 삶의 방식의 결론이 내 몸인 건 아닌데 세상은 너무 쉽게 몸으로 사람을 제단한다.

그러면 그건 세상 잘못인데 왜 나는 자책 모드로 들어가고 있나.

좋고 싫음이 확실하고, 달리기를 좋아하고, 철봉에 오래 매달릴 수 있고, 웃기는 자작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를 줄 아는 우리 첫째의 여러 모습 중에 과체중이란 부분은 아주 일부일 뿐인데.

왜 나는 세상 무너진 것처럼 병원 대기실 의자에서 벗어나질 못하나.


그래.

이건 내 잘못도 아니고 첫째 잘못도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말을 되뇌며 집에 와서 사과와 당근을 맹렬히 갈아 주스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 집에 과자는 없어. 앞으로 우리 집 간식은 엄마표 사과 주스뿐이야. 우리 1년만 식습관을 바꿔보자."

둘째의 거센 반항의 소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믹서기를 박박 문질러 씻었다. 휴. 엄마 노릇 노잼.




어제 이 난리굿을 치고도 오늘 점심엔 돈가스를 주고, 또 케이크 만들기 체험을 시킨 나도 참... 나다.

아니 암튼 이렇게 엄마가 지한테 잘하려고 애쓰면 쫌! 말 좀 잘 지.

잔소리하는 나를 피해 등 돌리고 머리카락을 줄줄 빨고 있는 첫째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진짜 더럽다. 머리카락을 자꾸 먹는지. 저러려고 머리 기르는 건지.

분명, 애 삶은 애 삶이고 내가 너무 애쓰지 말자, 일희일비하지 말자 다짐 또 다짐을 했는데 매일이 전쟁이다.

아, 엄마 노릇, 진짜 진짜 재미가 없다.

얼른 개학이나 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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