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5시, 애들을 태권도장에 데려다준다. 우리 애들이 다니는 태권도장의 인사법은 '태권, 관장님 사랑합니다'다. 도장에 들어서는 동시에 바른 자세로 서서 크게 외쳐야한다. 태권! 관장님, 사랑합니다!
나도 직장인 태권도를 다녀서 도장 분위기를 좀 아는데, 태권도장에선 예의 염치를 아는 것이 무도 수련보다 먼저라고 가르친다. 애들 관장님은 예의 염치가 인사 똑바로 하는 거에서부터 드러나는 거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런데 인사,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들어간 이 인사가 나도 애들도 영 입에 붙지 않았다.
태권도장 처음 등록한 날 인사를 배웠는데 태권! 까지는 씩씩하게 외쳤지만 그다음 말은 어색함에 몸을 비죽비죽 비틀었다. 나 또한 애들한테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한테나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왔는데 생전 처음 본 관장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인사처럼 쓸 수 있나 싶어 좀 불편했다.
그래도 애들 도장의 지도 관장님은 아주 다정한 스타일이었다. 애들이 쭈볏대며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자 관장님이 먼저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태권, 우리 00이 관장님이 많이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내일 또 열심히 수련합시다." 하시곤 애들을 높이 던졌다 안아 주셨다.
지도 관장님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애들도 슬슬 경계를 풀었다. 도장 다닌 지 두 해가 지나자 이제는 지도 관장님을 멀리서 발견해도 세상 떠나가라 인사하는 애들이 됐다. 태권! 관장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생겼다. 애들 도장엔 지도관장님과 총관장님이 따로 있는데, 부자 관계로 총관장님이 도장 전체적인 관리-차량 운행과 재정까지-를 맡고 계신다.
애들은 수련 전에 숨바꼭질도 해주고 때로 간식도 사주는 지도관장님한텐 사랑한다고 인사할 수 있지만 오다가다 마주치는 총관장님한텐 도저히 사랑한다는 인사가 입 밖으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특히 우리 애들은 태권도 차량 이용을 안 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총관장님과 마주칠까 말까 였다. 하지만 총관장님은 아주 엄한 스타일이어서 인사 똑바로 안 하는 애들은 호되게 나무라셨다.
하루는 내가 애들을 도장에 데려다주는데 총관장님을 만났다. 애들은 태권! 까진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다음 말은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꾸벅 숙였다. 총관장님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 똑바로 해야지, 하셨다. 그 서슬에 애들이 무서워서 예의 그 인사를 할 것 같았는데, 믿는 구석(=옆에 있는 나)이 있어서 그런지 멀뚱멀뚱 서 있다 태권! 만 다시 크게 말했다. 총관장님은 아직 애들이 어리고 학부모가 옆에 있으니 더 호되게 혼내진 못하시고 뒤에 사랑한다는 말은 어따 팔아먹었냐, 하시면서 제대로 인사해줘, 하셨다. 애들은 나 한 번, 총관장님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태권!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곤 도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아. 어색함은 나의 몫. 에미만 남겨두고 가버리다니.
나는 겸연쩍게 슬슬 웃으며 '사랑한다는 말은 가족끼리만 하도록 가르쳐서요, 헤헤'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집에 와서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아무리 애들이라도 어쩌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거다. 사랑한다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야만 할 수 있는 아주 무거운 말인 것이다. 실실 웃으며 그냥 자리를 뜰 게 아니었는데. 다음번에 총관장님이 사랑 인사를 강요하면 그러지 말아 달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과적으로는, 아직 총관장님께 정색하고 인사 못하겠다는 말을 할 상황은 오지 않았다. 마주칠 일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그날 일이 총관장님에게도 어색했던지 서로 대강 목례만 하고 만다. 애들도 요령이 생겨 총관장님을 뵈면 '태권! 관장님 으릉흡니다'정도로 인사하곤 얼른 도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래. 저 요량 제 알아서 하면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지. 애들 삶에 일일이 끼어들어서 이러저러 조정해주는 건 과잉보호 아닐까 생각했는데 잘됐다.
그런데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을 인사로 정한 건 누구였을까. 총관장님이었을까, 혹은 그 윗대 사범님이었을까. 수련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나 듣고 싶었던 1인이었겠지.
그분은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나로선 도장 드나들 때 인사로 그냥 주고받기엔 너무 무겁고 어려운 말 같은데. 그래도 자주 그런 말을 주고받다 보면 정말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려나.
아니 근데 애초에 사제간에 스승에 대한 은혜, 제자에 대한 보살핌 정도만 존재하면 됐지 사랑까지 있어야 하나? 내가 너무 삭막한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5시 34분. 애들 데리러 갈 시간이다.
오늘도 태권, 관장님 사랑합니다 하며 도장을 나서는 애들을 맞게 되겠지.
맘 복잡할 땐 그냥 애들한테 물어본다. 내 속에서 잘 정리 안 되는 부분은 애들한테 물어보면 항상 단번에 결론이 난다.
관장님한테 사랑한다고 인사하는 거 어렵지 않니, 물어보고 본인이 아무렇지 않으면 괜찮은 거니까 더 이상 내가 개입하려 들지 말아야지.
애들 삶은 애들 것. 내 것이 아니다.
불편함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까지가 내 역할임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