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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Feb 19. 2024

아이의 일기장엔 내 욕만 쓰여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학기가 지났다. 여름 방학을 열흘 앞둔 오늘, 그동안 아침마다 썼다는 일기를 가져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워낙 말 안 해주는 아이라 아침 일기에 뭘 썼는지 궁금해서 설레며 읽었다.

처음엔 글씨가 서툴러서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글씨 쓰는데 능숙해지면서 쓴 내용이 순 내 욕(혹은 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음은 일기장 내용의 일부이다.



6월 15일 수요일.

오늘 신발장에서 엄마가 밀쳤다. 너무 슬펐다.

(현관문에서 신발 안 신고 계속 미적거리길래 얼른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감정이 다분히 들어갔던 행동 맞고, 내가 잘못한 거 맞다. 그래도 젠장! 그걸 아침 일기에 쓰다니! 선생님이 읽고 맞춤법을 고쳐주기까지 하셨다. 엉엉.)


6월 20일 월요일.

오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오늘 밤에 수업을 간다. 그럼 나 혼자 자야 하는데(실상 지 아빠랑 잔다) 너무 슬프다.


6월 24일 금요일.

오늘 아침으로 김밥을 줘서 먹었다. 김밥은 너무 맛이 없다...


6월 27일 월요일.

오늘 엄마에게 혼났다. 너무너무 슬퍼서 울었다. 왜 혼났냐면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했다. 지금도 슬프다. 지금도 울고 싶다. ㅠㅠㅠㅠ(ㅠ<<표시를 4개나 써놨다)


6월 28일 화요일.

오늘은 아침밥으로 엄마가 우유에 죠리퐁을 말아줬다. 너무 맛있었다! 지금도 또 먹고 싶다!

(아침밥으로 죠리퐁 주는 엄마인 게 들켜서 괴로웠다...)



아침 일기를 다 읽고 나서 자식한테 말했다. 엄마에 대 좋은 얘기는 왜 일기장에 없냐고.

그러자 자식이 전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 마음이지, 왜?' 한다.


그래.

그렇긴 하지. 네 마음이지.


내가 저한테 한 행동 중 좋은 것만 써달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부탁일 것이다. 솔직히 선생님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는데, 나와 있었던 일 중 안 좋은 일만 기억하고 일기에 쓴 게 서운하고 슬펐다. 하루 중 내가 잘해준 일도 있었을 테지만 자식에게 남는 것은 아무래도 잘 못해준 일인가 보다. 나는 내가 잘해준 것만 기억만 남길 바랐는데. 쳇. 역시 그렇게는 안 되는 건가.


하긴.

나도 부모님이 잘해줬던 일보다 서운하게 했던 일만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자식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건가.


생각해보니 아침에 애한테 살갑게 대 적이 별로 없기도 하다.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대다가 자식이 빨리 밥 차려 달라고 닦달하면 신경질 내며 겨우 일어나니까. 넌 대체 왜 6시부터 일어나서 밥 차리라고 난리, 하면서.


마음을 좀 다스려보려고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자꾸 삐죽삐죽 올라왔다. 이미 일기장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만화책 읽으며 낄낄 웃고 있는 애한테 다시 말을 걸었다.


나: 근데, 엄마가 맨날 나쁜 건 아니잖아? 잘해줄 때도 있잖아.

자식: 언제?

나: 언제?? 너무 사랑한다, 넌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냐, 태어나줘서 고맙다 이런 말 숨 쉬듯이 하잖아!

자식: 그런 말도 하지만 보통은 잔소리를 많이 하지.

나: 잔소리가 뭔데? 학교 다녀오면 손 씻으라거나 만화책만 읽지 말라고 하는 거? 그런 게 잔소리야?

자식: (잘 알고 있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 끄덕임)

나: 그럼 엄마가 암말 안 해도 손 씻으면 되잖아. 그리고 만화책을 보지 말라는 게 아니고 만화책만 보는 건 좀 아니라는 거지.

자식: (잔소리  시작, 하는 지겨운 표정)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알고 있어. 그리고 그런 할 일을 잘하지 않더라도 사랑만 해주길 원해. 아~무 할 일을 안 해도 좋은 말만 해주는 게 잔소리 안 하는 거야.

나: 네 말이 다 맞지만 엄만 매일 그렇겐 못하겠어.

자식: 그럼 잔소리만 하는 나쁜 엄마 되는 거지 뭐.(다시 만화책에 얼굴 파묻음)


이렇게 1차 대화가 일방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결과에 승복이 안됐다.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나: 그럼 아빠는? 아빠는 잔소리 안 해?

자식:(만화책 보는데 자꾸 말 걸어서 귀찮고 짜증 난다는 표정) 아빠는 좋은 소리 할 때도 있고 잔소리할 때도 있어. 그래서 일단 들어봐야 돼.

나: 엄마는 그럼 항상 잔소리만 한다는 거야?

자식: 보통 그래.

나: 진짜 억울해! 아빠는 집에 거의 안 들어오니까 아무래도 너랑 이야기할 시간이 적어서 그런 거잖아. 엄마가 너한테 잘할 때도 많은데!

자식:(힐끗 나를 보고는 묵묵부답. 다시 만화책으로)


진짜 억울하다. 아침저녁을 차리는 사람도 나, 저가 좋아하는 옷을 매일 빨아 개어두는 사람도 나, 등하굣길을  함께하는 사람도 나, 방과 후 간식을 챙기는 사람도 나인데 그런 부분은 자식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방과 후에 집에 와서 손 씻으라 잔소리하는 사람, EBS 방송 듣고 문제 풀어라 닦달하는 사람, 파닉스 가르치다가 승질내는 사람만 지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딴엔 잘하려고 애쓰는데 자식에게 결국 나쁜 엄마로만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했다. 너무 서운하니까 딸꾹질이 나왔다. 딸꾹 딸꾹 거리면서 자식 필통을 정리하고 부러져 있는 연필을 꺼내 깎았다. 씨. 지금도 난 네가 내일 가져갈 연필을 깎아 주고 있는데. 섭섭하다 섭섭해.

연필 깎는 소리가 평소랑 달랐는지(사실 팍팍 소리 내면서 거칠게 깎았다) 뭔가 이상한 공기를 느낀 자식이 다가왔다.


자식: 왜 그래?

나: (묵묵부답)

자식: 내가 아까 나쁜 엄마라고 해서 그래?

나: (묵묵부답)

자식: 휴. 이제 그런 말 안 할게. 사실은 다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서러움 폭발) 흑흑. 마음에도 없는 말 해줄 필요 없어. 이제부터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잔소리라고만 생각할 테니까.


왕 유치한 대사를 읊으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연필을 드르륵 드르륵 깎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애가 필살기를 썼다. 반질반질한 이마와 볼을 내 얼굴에 마구 문지르며 뽀뽀를 하는 거다. 평소엔 스킨십에 매우 인색한 스타일인데, 내가 지때문에 속상해하면 이렇게 필살기로 뽀뽀 공격을 쓰곤 한다.

볼이 너무 말랑하고 아기 냄새가 폴폴 나서 마음이 풀릴 뻔했는데 서운한 마음 한 조각이 심지처럼 남아 가시질 않았다.

"아, 이제 안 그럴게~엄마 좋은 엄마야~내가 괜한 말을 했어~마음 풀어~알았지? 뽀뽀~뽀뽀~"

자기가 뽀뽀까지 해줬는데 마음이 안 풀면 옹졸한 사람이라는 투다.

어른으로서 계속 삐쳐 있을 수 없어서 어찌어찌 풀고 대충 넘어갔는데, 배우자가 퇴근하고 식탁 위에 놓인 일기장을 읽더니 폭소를 터뜨리며 폭탄을 던졌다.

"뭐야. 순 당신 욕뿐이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네가 오늘 내 버튼 눌렀다.

엉엉, 내가 지한테 잘하려고 얼마나 애쓰는데, 맨날 잔소리한다고만 하고, 엉엉, 나 이제부터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당신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하며 기어이 못난 모습 다 내보이고야 말았다.

배우자는 깜짝 놀라서 달랜다고 한다는 말이 이거다.

"여보, 그러지 마. 그래도 당신은 일기에 등장하잖아. 내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다. 자식이 학교에서도 를 생각하고, 내 일정에 영향을 받고, 때로 슬퍼하고, 때로 불평하고, 때로 좋아하고(죠리퐁을 좋아했던 거지만)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면 사실 울고 불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운 이유는, 내가 자식을 너무 많이, 저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억만 배는 더 많이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만큼 날 사랑해주지 않고, 나에 대해 안 좋은 부분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서운하고 억울했던 거였다. 쓰고 보니 너무 구질구질하다. 원래 짝사랑은 쿨해질 수가 없다더니.

나도 무던히도 엄마 속 썩이고 엄마 말 안 듣고 그랬다. 엄마도 내 앞에서 많이 울었다. 어떻게 엄마한테 한마디도 안 지고 이럴 수 있냐, 하면서.

엄마가 나 때문에 속상해서 울 때마다 내 말이 다 맞는데 엄만 왜 저래, 했던 것 같다.

내 자식도 그렇겠지.

나는 좀 가르쳐보려고 하는 소린데 지 귀에 잔소리로 들리면, 내가 입을 좀 닫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진짜 내가 더 맞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더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러다 순식간에 꼰대 소리 듣겠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 잔소리쟁이 타이틀을 받는 건 진짜 싫다.


다음 학기엔 조신하게 굴면서 아침 일기에 엄마 칭찬도 써질 수 있도록 공을 들여봐야겠다. 비굴하게 비위를 맞추진 않겠지만 최소한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침부터 느낄 수 있도록 폭포수 같은 사랑을 쏟아부어줘야겠다. 아침 일찍 깨워도 신경질 내지 않고, 김에 밥 싸서 대충 내어주지 않고, 하지 말라는 행동 반복해서 해도 좋은 말로 다독여줘야지. 


참, 옛말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 인간 만든다는 말만은 진짜 옳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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