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날 만날 귀찮으니 카레나 한 솥 끓여 애들 먹이고, 쯧쯧!"
영화 <엑시트>에서 친정 엄마가 딸의 무심함을 타박하는 대사다. 요컨대 아이에게 정성스레 밥을 안 차려준다는 건데, '정성스럽지 않은 밥'의 보조관념으로 카레가 등장한다.
카레는 가족 중 식사를 담당하는 자가 멀리 갈 때 오래 먹을 수 있도록 끓여 놓는 음식, 혹은 밥하기 귀찮을 때 대량 만들어놓는 음식으로 자주 치부된다.
그런데 나는 카레를 만들 때마다 카레는 왜 그런 평가를 받게 됐을까 따져보게 된다. 모든 음식이 시간과 정성의 결과물이겠지만, 요리 고수들에게 재료 다 때려 넣고 끓이는 스튜 요리는 시시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며칠 전부터 카레를 식단에 넣을 것을 계획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한 시간 이상 요리에 선뜻 쓸 큰마음을 먹고서야 카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카레 가루를 사야 한다. 입 짧은 우리 집 애들이 먹는 건 카레여왕 시리즈 중 망고&바나나맛뿐인데 그건 동네 슈퍼엔 안 판다. 홈플러스에만 있다.
일부러 운전해서 가서, 좁은 주차구역에 차를 밀어 넣고, 지하 2층 카레 코너를 찾아 마침내 망고&바나나맛을 획득한다.
내 입맛에 맞추려면 야채만 넣으면 좋겠지만 비린 것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기막히게 구분하는 우리 집 대장금이들을 위해 카레용 고기도 좀 산다.
흙당근, 양파, 햇감자, 토마토도 마련한다. 이건 집 앞에 열리는 5일장에서. 5일장 열리는 날짜에 맞춰서 고기 등을 사놔야 신선한 재료로 만든 카레를 먹일 수 있다. 치밀한 시간 계산이 필요하다.(비장)
오후 1시에 하교하는 애 EBS 방송 틀어주고 나면 카레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는 30분이 생긴다.
먼저 재료 다듬기.
당근에 묻은 흙을 꼼꼼하게 씻고 필러로 껍질을 깐다. 한 개 다 넣으면 우웩, 안 먹어 같은 소리 나오니까 반개만 쓴다.
햇양파는 금방 무르니까 건조한 수납장에 넣어두고 눈물 콧물 흘리며 껍질을 까둔다.
햇감자는 마침 애들이 캐 온 게 있어서 중간 크기 애를 잘 까서 대기시킨다.
준비된 채소들을 아주 작게, 균일한 크기로 깍둑썰기한다. 크기가 들쭉날쭉이면 또 큰 조각은 안 먹는다고 하는 애가 집에 있으니까.
바닥이 두꺼운 냄비를 준비해 오래 달군 뒤 버터 한두 조각 뚝뚝 썰어 넣는다. 버터가 녹으면서 나는 고소하고 달큼한 향기가 부엌을 메우면 썰어둔 채소 우루루 투하. 양파가 투명해지고 감자랑 당근이 말캉해질 때까지 매매 볶는다.
그다음엔 재료가 약간 덜 잠기게 물을 부어 준다.
물이 부글부글 끓으면 토마토를 쓱쓱 썰어 넣는다. 토마토를 넣으면 카레의 풍미가 확 올라간다고 믿는다. 고오급 요리 느낌이 난달까? 게다가 끓이면서 껍질이 다 녹아 없어져서 애들은 토마토가 들어간 줄도 모르고 잘 먹는다. 평소엔 절대 안 먹고 토하려고 하는 야챈데. 크큭. 야채 하나라도 더 먹이기 목표 달성.
이제 약불에 20분 정도 뭉근히 올려 두면 된다.
이렇게 카레 만드는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싱크대에 쌓인 방대한 야채 껍질, 고기용 도마, 야채용 도마, 칼 두 자루, 미끈거리는 비계 껍질을 치우는 것까지가 요리다.
냄비 주변에 넘쳐흐른 카레 가루와 야채에서 나온 즙 등을 싹 닦고 싱크대까지 정리하고 나면 마침내 카레 요리 완성. 이 모든 일을 EBS 강의가 끝나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카레를 완성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냉정한 평가의 시간이 남았기에.
시각을 교란시켜 맛이 더 나은 것처럼 느끼게 만드려고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그릇에 카레와 밥을 담는다. 밥 4: 카레 5 정도 해서 공들여 담는다. 우엥, 이 그릇 싫어! 하고 퇴짜 맞으면 다른 그릇으로 바꿔도 준다. 관대하게. 지금은 애써 만든 음식의 평가시간이니까. 평가단에게 잘해야지.
그래서 한 끼 잘 먹어주면 오케이, 두 끼까지 먹어주면 그레잇, 세 끼 내리 먹어주면 슈퍼 그레잇이다(아직 슈퍼 그레잇 점수는 받아보지 못했지만).
엄마에게 합격 메달은 언제쯤 주어질까요.
아무튼 카레를 평가절하하는 세간의 태도는 집안일 평가절하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밥하기 싫으니까 곰국이나 카레 한 솥 끓이지, 같은 말은 그 요리를 직접 안 해본 사람 입에서 주로 나온다. 더운 날 불 앞에서 솥요리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집에서 밥이나 하는 밥순이 주제에, 라든지 집안일만 하는 네가 뭘 알아, 같은 말도 주부를 무시하는 맥락에서 드라마에 자주 쓰이는 펀치라인이다.
아니, 돈 안 줄 거면 무시나 말았으면 좋겠다. 꼭 집안일 안 해본 사람이 무시는 더 오지게 한다. 청소 빨래 설거지 장보기 냉장고 정리 계절별 옷 정리 등에 집안일 총괄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와 상념이 얼마나,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는 정말 해본 사람만 안다. 변기 청소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변기를 닦아본 사람뿐.
아, 집안일 근속 20년 하면 누가 상 좀 줬으면 좋겠다. 공식석상 같은데 초대돼서 크리스털 상패를 들고 스피치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포 카메라를 들고 취재 온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거다.
"여러분. 카레 만들기 *나게 힘들어요. 누가 만들어주면 감사히 *먹으세요."
아. 생각만 해도 속 시원하다. 현실은 애들의 카레 평가에 전전긍긍하는 아줌마더라도 상상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드디어 저녁을 다 먹였다.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주방 불을 끄며 혼자 작게 읊조려본다.
오늘의 요리왕상. 아줌마의 온갖 정성이 다 들어간 카레에게 줍니다.
* 이미지 출처 : 오뚜기 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