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학기가 지났다. 여름 방학을 열흘 앞둔 오늘, 그동안 아침마다 썼다는 일기를 가져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워낙 말 안 해주는 아이라 아침 일기에 뭘 썼는지 궁금해서 설레며 읽었다.
처음엔 글씨가 서툴러서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글씨 쓰는데 능숙해지면서 쓴 내용이 순 내 욕(혹은 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음은 일기장 내용의 일부이다.
6월 15일 수요일.
오늘 신발장에서 엄마가 밀쳤다. 너무 슬펐다.
(현관문에서 신발 안 신고 계속 미적거리길래 얼른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감정이 다분히 들어갔던 행동 맞고, 내가 잘못한 거 맞다. 그래도 젠장! 그걸 아침 일기에 쓰다니! 선생님이 읽고 맞춤법을 고쳐주기까지 하셨다. 엉엉.)
6월 20일 월요일.
오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오늘 밤에 수업을 간다. 그럼 나 혼자 자야 하는데(실상 지 아빠랑 잔다) 너무 슬프다.
6월 24일 금요일.
오늘 아침으로 김밥을 줘서 먹었다. 김밥은 너무 맛이 없다...
6월 27일 월요일.
오늘 엄마에게 혼났다. 너무너무 슬퍼서 울었다. 왜 혼났냐면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했다. 지금도 슬프다. 지금도 울고 싶다. ㅠㅠㅠㅠ(ㅠ<<표시를 4개나 써놨다)
6월 28일 화요일.
오늘은 아침밥으로 엄마가 우유에 죠리퐁을 말아줬다. 너무 맛있었다! 지금도 또 먹고 싶다!
(아침밥으로 죠리퐁 주는 엄마인 게 들켜서 괴로웠다...)
아침 일기를 다 읽고 나서 자식한테 말했다. 엄마에 대한 좋은 얘기는 왜 일기장에 없냐고.
그러자 자식이 전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 마음이지, 왜?' 한다.
그래.
그렇긴 하지. 네 마음이지.
내가 저한테 한 행동 중 좋은 것만 써달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부탁일 것이다. 솔직히 선생님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는데, 나와 있었던 일 중 안 좋은 일만 기억하고 일기에 쓴 게 서운하고 슬펐다. 하루 중 내가 잘해준 일도 있었을 테지만 자식에게 남는 것은 아무래도 잘 못해준 일인가 보다. 나는 내가 잘해준 것만 기억만 남길 바랐는데. 쳇. 역시 그렇게는 안 되는 건가.
하긴.
나도 부모님이 잘해줬던 일보다 서운하게 했던 일만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자식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건가.
생각해보니 아침에 애한테 살갑게 대한 적이 별로 없기도 하다.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대다가 자식이 빨리 밥 차려 달라고 닦달하면 신경질 내며 겨우 일어나니까. 넌 대체 왜 6시부터 일어나서 밥 차리라고 난리니, 하면서.
마음을 좀 다스려보려고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자꾸 삐죽삐죽 올라왔다. 이미 일기장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만화책 읽으며 낄낄 웃고 있는 애한테 다시 말을 걸었다.
나: 근데, 엄마가 맨날 나쁜 건 아니잖아? 잘해줄 때도 있잖아.
자식: 언제?
나: 언제?? 너무 사랑한다, 넌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냐, 태어나줘서 고맙다 이런 말 숨 쉬듯이 하잖아!
자식: 그런 말도 하지만 보통은 잔소리를 많이 하지.
나: 잔소리가 뭔데? 학교 다녀오면 손 씻으라거나 만화책만 읽지 말라고 하는 거? 그런 게 잔소리야?
자식: (잘 알고 있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 끄덕임)
나: 그럼 엄마가 암말 안 해도 손 씻으면 되잖아. 그리고 만화책을 보지 말라는 게 아니고 만화책만 보는 건 좀 아니라는 거지.
자식: (잔소리 또 시작이네, 하는 지겨운 표정)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알고 있어. 그리고 그런 할 일을 잘하지 않더라도 사랑만 해주길 원해. 아~무 할 일을 안 해도 좋은 말만 해주는 게 잔소리 안 하는 거야.
나: 네 말이 다 맞지만 엄만 매일 그렇겐 못하겠어.
자식: 그럼 잔소리만 하는 나쁜 엄마되는 거지 뭐.(다시 만화책에 얼굴 파묻음)
이렇게 1차 대화가 일방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결과에 승복이 안됐다.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나: 그럼 아빠는? 아빠는 잔소리 안 해?
자식:(만화책 보는데 자꾸 말 걸어서 귀찮고 짜증 난다는 표정) 아빠는 좋은 소리 할 때도 있고 잔소리할 때도 있어. 그래서 일단 들어봐야 돼.
나: 엄마는 그럼 항상 잔소리만 한다는 거야?
자식: 보통 그래.
나: 진짜 억울해! 아빠는 집에 거의 안 들어오니까 아무래도 너랑 이야기할 시간이 적어서 그런 거잖아. 엄마가 너한테 잘할 때도 많은데!
자식:(힐끗 나를 보고는 묵묵부답. 다시 만화책으로)
진짜 억울하다. 아침저녁을 차리는 사람도 나, 저가 좋아하는 옷을 매일 빨아 개어두는 사람도 나, 등하굣길을 늘 함께하는 사람도 나, 방과 후 간식을 챙기는 사람도 나인데 그런 부분은 자식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방과 후에 집에 와서 손 씻으라 잔소리하는 사람, EBS 방송 듣고 문제 풀어라 닦달하는 사람, 파닉스 가르치다가 승질내는 사람만 지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딴엔 잘하려고 애쓰는데 자식에게 결국 나쁜 엄마로만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했다. 너무 서운하니까 딸꾹질이 나왔다. 딸꾹 딸꾹 거리면서 자식 필통을 정리하고 부러져 있는 연필을 꺼내 깎았다. 씨. 지금도 난 네가 내일 가져갈 연필을 깎아 주고 있는데. 섭섭하다 섭섭해.
연필 깎는 소리가 평소랑 달랐는지(사실 팍팍 소리 내면서 거칠게 깎았다) 뭔가 이상한 공기를 느낀 자식이 다가왔다.
자식: 왜 그래?
나: (묵묵부답)
자식: 내가 아까 나쁜 엄마라고 해서 그래?
나: (묵묵부답)
자식: 휴. 이제 그런 말 안 할게. 사실은 다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서러움 폭발) 흑흑. 마음에도 없는 말 해줄 필요 없어. 이제부터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잔소리라고만 생각할 테니까.
왕 유치한 대사를 읊으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연필을 드르륵 드르륵 깎았다. 그모습을 지켜보던 애가 필살기를 썼다. 반질반질한 이마와 볼을 내 얼굴에 마구 문지르며 뽀뽀를 하는 거다. 평소엔 스킨십에 매우 인색한 스타일인데, 내가 지때문에 속상해하면 꼭 이렇게 필살기로 뽀뽀 공격을 쓰곤 한다.
볼이 너무 말랑하고 아기 냄새가 폴폴 나서 마음이 풀릴 뻔했는데 서운한 마음 한 조각이 심지처럼 남아 가시질 않았다.
"아, 이제 안 그럴게~엄마 좋은 엄마야~내가 괜한 말을 했어~마음 풀어~알았지? 뽀뽀~뽀뽀~"
자기가 뽀뽀까지 해줬는데 마음이 안 풀면 옹졸한 사람이라는 투다.
어른으로서 계속 삐쳐 있을 수 없어서 어찌어찌 풀고 대충 넘어갔는데, 배우자가 퇴근하고 식탁 위에 놓인 일기장을 읽더니 폭소를 터뜨리며 폭탄을 던졌다.
"뭐야. 순 당신 욕뿐이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네가 오늘 내 버튼 눌렀다.
엉엉, 내가 지한테 잘하려고 얼마나 애쓰는데, 맨날 잔소리한다고만 하고, 엉엉, 나 이제부터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당신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하며 기어이 못난 모습 다 내보이고야 말았다.
배우자는 깜짝 놀라서 달랜다고 한다는 말이 이거다.
"여보, 그러지 마. 그래도 당신은 일기에 등장하잖아. 내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다. 자식이 학교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내 일정에 영향을 받고, 때로 슬퍼하고, 때로 불평하고, 때로 좋아하고(죠리퐁을 좋아했던 거지만)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면 사실 울고 불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운 이유는, 내가 자식을 너무 많이, 저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억만 배는 더 많이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만큼 날 사랑해주지 않고, 나에 대해 안 좋은 부분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서운하고 억울했던 거였다. 쓰고 보니 너무 구질구질하다. 원래 짝사랑은 쿨해질 수가 없다더니.
나도 무던히도 엄마 속 썩이고 엄마 말 안 듣고 그랬다. 엄마도 내 앞에서 많이 울었다. 어떻게 엄마한테 한마디도 안 지고 이럴 수 있냐, 하면서.
엄마가 나 때문에 속상해서 울 때마다내 말이 다 맞는데 엄만 왜 저래, 했던 것 같다.
내 자식도 그렇겠지.
나는 좀 가르쳐보려고 하는 소린데 지 귀에 잔소리로 들리면, 내가 입을 좀 닫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진짜 내가 더 맞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더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러다 순식간에 꼰대 소리 듣겠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 잔소리쟁이 타이틀을 받는 건 진짜 싫다.
다음 학기엔 조신하게 굴면서 아침 일기에 엄마 칭찬도 써질 수 있도록 공을 들여봐야겠다. 비굴하게 비위를 맞추진 않겠지만 최소한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침부터 느낄 수 있도록 폭포수 같은 사랑을 쏟아부어줘야겠다. 아침 일찍 깨워도 신경질 내지 않고, 김에 밥 싸서 대충 내어주지 않고, 하지 말라는 행동 반복해서 해도 좋은 말로 다독여줘야지.
참, 옛말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 인간 만든다는 말만은 진짜 옳으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