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Jun 03. 2024

우리가 눈이 마주치던 순간

요즘 결혼식에 가는 일이 부쩍 줄었어. 엄마가 나이가 점점 들어간다는 거겠지. 엄마 친구들은 이제 거의 결혼을 한 상태거나, 아니면 결혼했다가 혼자되기를 선택한 상태거나, 아예 결혼을 안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메우고 있어.


그런데 지난주에 너랑 결혼식장에 다녀왔잖아. 엄마가 교회에서 알던 동생이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결혼 소식을 전해 주네. 전엔 청첩장 받는 일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마냥 기쁘기만 해.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취업 전엔 수입이 없으니 축의금 내기가 어려워서 마음이 어려웠고, 취업 후엔 누구랑 가야 할지 막막했던 것 같아. 지금은 결혼식이나 돌잔치를 알려 오는 지인이 드무니까 그런 이벤트가 내심 반가워. 결혼식도 돌잔치도 참 축하할 일이고, 그래서 주인공도 참석하는 사람도 표정이 밝고,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도 많잖아. 특히 요즘 결혼식은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결혼식 축가가 뮤지컬 공연처럼 진행되는 곳도 있었지.


지난주 결혼식은 야외 결혼식이었잖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송이가 크게 벌어진 연한 핑크색 꽃들이 테이블마다 넘치게 벌여 있었지. 신랑 신부의 커플 댄스로 입장을 시작하는 것도 얼마나 재밌던지. 너도 막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고. 사람들은 네가 춤추는 거 보고 또 웃고. 남의 결혼식인데 내가 다 행복해지더라.


점점 결혼식이 전통적인 틀을 깨는 게 엄마는 참 좋아. 신부는 보통 미동 없이 서 있고, 결혼 서약 할 때도 고개만 겨우 끄덕여야 했는데(신부는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요즘 결혼식은 신부가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게 정말 멋져.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버진 로드(이름조차 싫네!)를 걸어 신랑에게 인계하는 것도 엄마는 싫었거든? 그런데 요즘 결혼식엔 신랑 신부가 손잡고 걸으면서 하객들이랑 인사도 하고, 웃고 그러는 게 참 보기 좋더라. 엄마 결혼할 땐 신부 엄마가 보통 울고 있구, 신부도 따라 울구 그런 일이 많았거든. 요즘 결혼식이 재밌고 웃음 나는 이벤트가 된 건 너무 멋진 일 같아. 또 신부가 흰 드레스가 아니라 검정 드레스나, 바지를 입고 서는 일도 많다고 하니 그 다양성이 얼마나 멋진지.      

요즘은 주례 없이 결혼하는 것이 유행인가 보지? 결혼할 사람이랑 별 관련 없는 사람이 주례사로 제일 많이 시간을 잡아먹는 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참 잘 됐어. 이번에 우리가 간 결혼식에서도 주례가 없었고, 대신 신랑 신부가 혼인 서약서를 읽었던 게 기억나. 엄마는 그 혼인서약서를 누가 쓰는 건지 정말 궁금해. 어딜 가나 내용이 비슷하더라고. 엄마는 혼인 서약서 내용을 유심히 듣는 편이야. 아니, 사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지.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 때가 많거든. 언젠가 인터넷에서 '센스 있는 혼인 서약서' 같은 게 돌아다니는 걸 읽은 적이 있어. 신랑은 '결혼 후에도 아내의 꿈과 목표를 존중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하고, 신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남편을 존중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더라고. 내용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 그런데 왜 결혼 후에도 아내의 꿈과 목표는 남편에게 존중받아야만 지속이 가능한 걸까? 생각하게 되더라고.      

아무튼, 이번 결혼식에서는 혼인서약서 내용이 어떨지 궁금했어. 그래도 시대가 달라진다고들 하고, 결혼식 틀도 계속 달라지기도 하고. 이번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공부도 오래 한 사람들이고 해서 뭐라고 할지 귀를 세우고 들었지.

신랑이 먼저 웃으며 꺼낸 말이 기억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미리 연락해 주는 센스 있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말을 이었지.

'남편이 회식을 하고 귀가시간이 늦어도 항상 이해해 주려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또 신랑이 말했지.

'아내와 여유 있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항상 유지하겠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말했지.

'신랑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게 최고의 애교를 보여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랑이 말했어.

'아내가 무엇을 차려주던 감사히 먹겠습니다.'

신부가 마지막으로 말했어.

'늘 제철 음식을 차려주어 남편이 건강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엄마는 친구가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할 때 가슴이 먹먹해지더라. 얘가 정말 그렇게 살려고 그러나? 누구보다 누워 있는 거 좋아하고, 밤늦게까지 술 먹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앤데? 친구를 잘 모르는지 주변 사람들은 다 웃고, 손뼉 치고. 잘한다! 그러고.  그러니까 더 서러워서 막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고.     

그때,

모두가 그 말에 손뼉치고 웃던 그때,

너랑 나랑 눈이 딱! 마주쳤잖아.     

너는 나를 봤고,

나는 너를 봤어.

그리고 너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혀를 쭉 내밀어 보였지.

눈을 크게 치켜 떴다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어.  

엄마는 그때 정말 배를 잡고 웃었어. 깔깔깔깔. 가슴이 툭 터진 것 같이 웃었어.     


엄마는 말이야. 요즘 웃을 일이 참 없었거든.

 애교 부리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어야 하는 게 아내의 역할이라는 세상의 태도가 참 밥맛없게 느껴졌어.

그래서 친구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남편이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데 여자가 사근사근해야지'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어.


그런데 너와 눈이 마주치던 그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 설명할 수 없었던 부조리함과 답답함을 네가 모두 알아차린 걸 알았어.

혀를 내밀고 눈알을 굴림으로써.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다르다는 걸 우리는 눈빛 한 번만으로 주고받았어.

사람은 성별로만 고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절대적인 역할 따위는 없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지.


우리 둘이 눈이 마주친 순간을 내가 자랑스러워해도 될까.

부당한 일에 대해 발을 구르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한 번 으쓱임으로, 눈알을 굴림으로 웃음거리로 만든 너의 우아함에 대해 감탄해도 될까.     


네 덕분에 결혼식의 남은 시간 동안 배경음으로 깔린 핑클 노래에 엉덩이 춤을 추며 기분을 잡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어.

10초도 안 될, 우리의 눈이 마주치던 순간 덕분에.




이미지 출처: 브레이킹 던

이전 24화 엄마로만은 살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