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아파서 학교를 안 가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요가도, 상담도 할 수 없다. 그저 첫째 아침밥 차리고, 잠깐 EBS 강의 틀어줬다가, 점심 차리고, 같이 도서관 다녀오는 일상을 보낸다.
일상에서 '나'가 없어지니 불안증이 또 도졌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오늘 하루종일 뭐 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이를 돌보는 게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닌데,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값어치 없는 시간이 아닌데 왜 자꾸 하루가 허무할까.
생각해 보니 사람은 '역할'로서만 존재하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엄마, 며느리, 딸, 배우자 같은 역할로만 매일을 살면 일상이 허전하고 쓸쓸해졌다. 그 역할이 가볍다거나 무가치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정말 애가 쓰이는 대단한 일이다. 문제는 내가 역할로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애초에 역할 자체를 잘 감당하지도 못한다. 100점짜리 엄마도 아니고, 며느리나 딸 역할로선 50점도 못 된다. 배우자 역할은... 쩜쩜쩜.
아무튼 하루종일 '변변치 않은 엄마 역할'만 하니 삶이 후줄근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줬을 땐 '나'로만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은 꼭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 구실을 했다. 역할 말고 그냥 '나'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걸으러 가고, 요가도 하고, 낮잠도 자고, 친구도 만났다. 하지만 아이가 아프고부턴 나만의 시간이 없어졌다. 글도 '응, 엄마 이것만 쓰고 갈게, 잠시만 잠시만'같은 변명을 해가며 토막토막 겨우 몇 줄 썼다. 그러니 글 내용이 중구난방으로 굴러갈 수밖에. 어제 쓴 문장과 오늘 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터덜 터덜 걸린다. 문장 중간에 나답지 않은 단어를 떡 써놔서 다음날 화들짝 놀라 고칠 때도 있다. 퇴고하지 못하고 올리는 글은 정말... 쩜쩜쩜.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불안증이 확 도졌다. 특히 밤이 심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잠이 안 왔다. 하루종일 소득 없이 보낸 하루가 아쉬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하룻밤새 꿈을 수십 개도 넘게 꿨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랜 시간 누워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이 발 밑까지 내려왔다. 그러고 다시 쳇바퀴 일상.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어제부터 자식이 뭐라 하든 말든 하루 1시간은 내 구실을 하기로 했다. 만화책 한가득 빌려다 준 뒤 나는 작은 방에 노트북을 안고 들어가 문을 딱 닫는다. 그러곤 뭐든지 쓴다. 불안증 상담 기록, 새로운 소설 구상, 그냥 일상 이야기... 뭐든지 쓴다.
그러고 나니 어젯밤은 누울 때 마음이 좀 편했다. 하루가 허투루 흘러가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역시 불안을 낮추는 데는 내 구실 똑바로 하는 게 제일이다.
내 구실을 제대로 한 날엔 불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