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4월이면 동네 벚꽃나무마다 하얗고 노란 꽃망울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밖에 나와도 좋을 만큼 날씨가 따뜻해졌는지 확인해보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모습들이다.
“어머, 벌써 꽃이 올라오려나 보다.”
제이가 말했다.
“아직 좀 더 있어야 될 걸?”
“아니야.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확 하고 필 거야.”
“그래도 며칠은 더 있어야 될 거야.”
“그러다 금세 다 져버리겠지…”
벚꽃을 볼 때마다 제이는 꼭 인생이 벚꽃 같다고 한다. 금세 폈다가 금세 져버리는 벚꽃. 그래서 벚꽃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는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고, 당장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
꽃을 좋아하는 제이는 매년 봄만 되면 벚꽃놀이를 가자며 나를 보챈다. 가능하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가고 싶다고 한다. 때마침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섬진강이다 진해다 하면서 아직도 벚꽃구경 갈 계획을 세우지 않고 뭐하냐며 시청자를 다그친다. 그때마다 제이는 거보라는 듯 은근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딱 한번, 시기를 맞춰 경주에 벚꽃구경을 간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는 처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간, 말하자면 가족여행 같은 거였다. 제이가 바라는 건 단둘이 오붓하게 꽃구경을 다녀오는 것이다. 그러니 경주에 갔던 걸 갖고 ‘그때 한 번은 다녀오지 않았냐’ 하고 대충 퉁(?) 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매년 봄마다, 올해는 꼭 벚꽃놀이를 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긴 하지만 봄에는 회사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다. 평일에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다. 벚꽃놀이 가려고 휴가를 냈다가 벚꽃처럼 순식간에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라고 한다면 엄살이겠지만 아무튼 그만큼 눈치가 보인다는 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꽃구경을 가려면 주말에 가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모처럼 마음먹고 나서는 길이다 보니 좋은 날로 고르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이번 주보다는 다음 주가 더 절정이겠지 하며 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말은 말 그대로 주말인지라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니까, 한 번만 미뤄도 일주일씩 미루게 된다. 네 번만 미루면 한 달이 훌쩍 가버린다. 그러다가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번 주말에는 무조건 가야지, 하고 결심해두고 있으면 꼭 그 주 금요일부터 비가 온다. 우산을 받쳐 들고 산책을 나가보면 동네 벚꽃들이 홍수를 만난 돼지처럼 빗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
막상 써놓고 보니 ‘내 입장’이라는 것이 비루하기 짝이 없긴 하다. 그래도 기왕 비루해진 김에 계속해보자면, 굳이 교외로 나가지 않더라도 당장 우리 동네만 해도 벚꽃나무가 보기 좋게 늘어서 있는 거리가 몇 군데 있다. 퇴근길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벚꽃들이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돼’ 하며 손짓하는 것 같다. 그런 손짓들을 어떻게 다 외면한단 말인가.
물론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사실은 안 가려고 한 게 아니라 좋은 날로 골라 보려다가 시기를 놓치게 된 것일 뿐이다라든가, 동네 벚꽃들이 손짓하는 걸 차마 두고 못 가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아직까지 제이에게 꺼낸 적은 없다. 그런데 지난봄에 함께 산책을 하던 제이가 가로등 아래 솜사탕처럼 풍성하게 핀 벚꽃을 보며, “우리 동네도 벚꽃이 참 예쁘네” 하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이에게는 제이만의 행복이 있는데, 어쩌면 나는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이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날 나는 제이의 손을 꼭 잡으며 다짐했다.
“여보, 우리 내년에는 꼭 벚꽃구경 가자.”
“괜찮아.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니, 그렇지 않다. 내년에는 꼭 당신과 함께 벚꽃구경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