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파는 노인의 예언

by 봄에 핀 코스모스

본가에서 연락이 와서 이러저러한 일로 필요하게 됐으니 인감도장을 좀 보내달라고 했다. 법률적인 문제와 관련된 거라 반드시 인감도장이라야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게 인감도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걸 만들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참에 하나 만드는 거지.”

제이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듣고 보니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인감도장 하나쯤 갖고 있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회사에 대충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연차휴가를 사용하도록 배려해줬다. 그날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아침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도장 파주는 곳이 있었다. 방수 잠바를 입고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다음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도장집 처마 밑에 자전거를 대놓고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세 평 남짓한 공간이 나왔다. 인장업자는 족히 팔십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자세가 곧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자신을 인장업자이면서 동시에 이름이나 필체로 일종의 관상을 보는 역술가라고 소개했다. 작업장 벽에는 온갖 종류의 자격증이나 임명장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혹시나 그런 게 있을까 하고 자세히 둘러보았지만 역술과 관련된 자격증이나 임명장은 없는 것 같았다.

노인은 손바닥만 한 메모지와 연필 한 자루를 건네주며 내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적어달라고 했다. 대충 흘려 쓰지 말고 획과 획을 육안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도록 반듯하게 써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정성을 들여 종이 위에 내 이름을 썼다. 잠시 후 노인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마치 논술 주제를 받은 수험생처럼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일이 분 정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도장 파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음, 절대로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매사 신중하고 정확한 성격입니다. 여기 이 서체에서 그런 게 보입니다. 게다가 항상 바르고 정의롭고자 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반드시 행동에 나서는 성품입니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지요.”

노인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듯 내 관상을 이야기했다. 내 이름과 글씨에 그런 관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허허, 그렇습니까 하고 웃을 뿐이었다. 틀린 말도 맞는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역술가들은 대체로 이렇게 애매한 말을 하는 건가.

도장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쯤, 노인은 혹시 내가 결혼을 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문득,

“아내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순종적인 아내를 맞이할 상인데, 아내가 순종적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훌륭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허허,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말이었다.

마침내 손에 받아 쥔 인감도장은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에 단풍처럼 노란 빛깔의 나무로 된 것이었다. 좋은 데서 인감도장을 새기고 나면 길한 기운을 받아서 앞으로 인감도장 쓸 일이 많아질 거라며, 노인은 앞서 자신이 한 말들 역시 새겨들으면 좋을 거라고 했다. 값을 치르면서 계산서를 보니 도장 새기는 비용만 청구되어 있었다. 따로 복채 같은 건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날은 종일 비가 왔기 때문에 산책을 나갈 수가 없었다. 낮에 인감 업자와 나눈 대화를 들려줬더니 제이는 그 사람 말을 새겨들으라며 노인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아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나 뭐라나.

피곤했던 건지 제이는 일찍 잠이 들었다. 나는 창 밖으로 내리고 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도장 파는 노인의 예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아내에게 들었던 조언이나 충고들을 나열해보고, 그중에 몇 개나 귀담아 들었던 건지, 내 마음대로 결정해버린 건 또 얼마나 되는지도 따져보았다.

‘아,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게 이 모양인 건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려는 순간, 얇은 금테 안경을 쓰고 있던 노인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과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던 걸까.

이전 06화아내의 도시락을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