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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 Sep 12. 2023

그림작가 첫 줄, 시작합니다.

이력 첫 줄부터 쓸게요.

2023년 올해는 유독 나의 처음이 많아 주름 가득한 나이가 되어도 뇌의 한 주름을 차지할 것 같다.


작년 여름, 방구석에서만 그림을 그리다 무료함을 느껴 화실을 찾았고 우연찮게 기름물감을 추천받아 유화를 그리게 되었다. 어느새 열정이 야금야금 삐져나와 나는 주말은 물론 퇴근 후 저녁을 굶고도 화실에 가고 있었고 주변에서 내 그림이 좋다는 얘기를 드문드문 들을 수 있었다. 그 엇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10년 넘는 세월 동안 잊고 있던 어릴 적 꿈이 문득 의식 위로 떠올랐다.


중학생이던 나는 예고에 가서 미대 준비를 하는 언니와 현실적인 아빠 덕분에 상황 판단이 빨랐다. 예술을 전공으로 하려면 꽤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순수하게 예술로 삶을 영위하는 건 소수의 몇몇만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아빠가 가여웠고 내가 얼른 성공이라는 것을 해서 아빠를 구원하고 싶다는 같잖은 영웅심리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한의대 현역 입학 후 본과 수석졸업으로 한의사가 되었는데 웃기게도 부모님은 너무나 잘 지내고 계시지만 나 혼자 여전히 방황 중이다. 당시 또래보다 철이 빨리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철이 들지 않아서 어쩌면 지금 가장 철없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이 많이 늦었지만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까.


공모전 사이트를 뒤지다가 서초문화재단, 서리풀 청년 아트 갤러리에서 주관하는 서리풀 청년 아트 마켓 작품 공모를 찾았고 만 39세 이하 청년작가 또는 갤러리 전시 참여 작가라면 지원이 가능했다. 다행히 나는 청년에 속했지만 나름 나태하게 살지 않았음에도 지원서 이력사항에 쓸 게 하나 없었다. 그래도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며 오히려 그래서 더욱 설렌다. 당당하게 처음이라고 적었다.



살펴보니 공모에 당선된 작가들 중 학력, 경력 한 줄 없이 텅 빈 건 나뿐인 것 같았는데 감사하게도 작가 이력이 하나 없는 내가 뽑혔고 유명한 작가님들과 한 공간에서 첫 전시를 할 기회를 얻었다. 전시기간은 9월 8일부터 10일까지, 8일은 평일이라 근무를 해서 못 갔지만 주말 이틀 동안 그 순간을 많이 담기 위해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갤러리까지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발표가 난 뒤 설렘을 숨기지 못해 유난 좀 떨었는데 정말 개인전 부럽지 않은 축하와 응원을 받았다. 수많은 작품 중 겨우 3점을 보러 먼 걸음 와주신 따스한 이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미래 주마등을 스칠 만큼 의미 있고 행복 가득한 순간, 생각노트 행복폴더에 저장했다.



방황 좀 하면 어떠랴. 성인이 되어 만난 주변 사람들은 물질을 내세워 과시하기 바빴고 머릿속으로 그에 따라 급을 매겼으며 그들이 원하는 한의사 딱지에 걸맞지 않게 방황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도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재밌다. 나 또한 무소유를 외칠 만큼 해탈하지 못해 먹고사는 게 필요한 인간인지라 건강하게 먹고 깨끗하게 살고 싶지만 억을 준대도 일단 그쪽엔 끼기 싫으니 접근하지 마시길.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지원했던 공모전인 관악문화재단, 관악아트마켓 예술상점에서 작품 2점이 이번달 24일까지 전시된다. 혹시 제 그림에 관심 있을까 봐 인스타 남겨요.

https://www.instagram.com/love.sh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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