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은 나의 머릿 속, 영어는 소음을 줄인다
나는 멈출 줄 모르는 사고의 회로를 지닌 사람이다. 멍하니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언제나 내면을 맴도는 문장들과 함께 살아왔다. 타인의 말 한 조각, 표정의 간극, 어조의 기울기에조차 의미를 부여하며, 생각은 종종 감정을 압도하고, 감정은 다시 생각의 토대를 흔들곤 한다.
이러한 과잉 감각의 중심엔 언제나 한국어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사전을 읽고, 낯선 단어의 어원을 음미하며, 문장의 결을 조율하는 일에 깊은 몰입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언어는 내게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해석하는 방식이자 감정을 증폭시키는 촉매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내게 끝없는 분석과 해석을 강요했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단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언제나 그 이면을 파헤치고, 숨겨진 맥락과 진의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 행위는 때로 내 정신을 과도하게 몰아붙이며, 생각이라는 이름의 미로에 나를 가두곤 했다.
그러던 중, 영어가 서서히 나의 두 번째 언어가 되어갔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한 외투 같았던 언어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사고를 잠재우고, 감정의 밀도를 낮추는 것을 느꼈다.
영어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순간, 내 사고 역시 영어 실력에 맞춰 단순화되기 시작했다. 문장은 짧아지고, 감정은 보다 직설적으로 표출되었으며, 말의 뉘앙스를 분석하는 대신,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문법이나 단어의 뉘앙스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 감정을 표현하는 발화가 우선되었다.
무언가를 덜 이해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 평온하게 만들었다. 의도를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언어적 긴장감이 해소된 순간, 나는 비로소 “덜 생각하는 상태”에서의 안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언어는 사고를 조형하고, 사고는 감정을 결정하며,
감정은 결국 존재의 양태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새로운 언어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재구성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어는 여전히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섬세하고, 깊고, 치명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영어는 내가 그 과잉의 세계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덜 알고, 덜 느끼고, 덜 해석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해방시켜 나가고 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언어는 단지 나의 생각을 옮기는 매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