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없는 세계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by 서랑

나는 한국에서, 말을 더듬는 '정상적인‘ 어른을 본 기억이 없다. 더듬거나 어눌한 말투는 늘 ‘비주류’의 것, 혹은 사회적 약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아이, 장애인, 외국인. 문법에서 벗어난 말은 흔히 ‘미성숙한 인격’으로 오해되곤 했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수단이 아닌, 판단과 위계의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호주에서 언어를 서툴게 구사하던 나는, 줄곧 미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말이 어색하면 사고 역시 어설플 것이라는 무언의 시선 속에서, 나의 삶 전체가 축소된 듯했다. 단어의 미묘한 어감을 다루지 못하자, 마치 삼색 볼펜 하나로 세상의 색을 그리려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새 영어를 나보다 더 서툴게 구사하는 이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 내가 버벅거리며 말할 때 이렇게 보이겠구나.” 그 찰나, 자존감이 스르륵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틀린 게 아니듯 나 또한 틀린 게 아니었음에도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정의해 온 것이다. 편견 없는 세상을 쫓아 이곳에 왔음에도 나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잣대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현지 동료들과의 관계가 그 굴절된 시선을 서서히 뒤엎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어눌한 문장을 비웃지 않았고, 더딘 단어 선택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 기다림 속에는 어떤 판단도 없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나보다 훨씬 어렸다. 가장 어린 동료는 고작 만 14세. 이곳에선 노동이 빠르고, 사회와의 접촉도 이른 시기에 시작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문화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타인의 언어적 미숙함조차 특별히 인식하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체감했다. ‘편견 없음’이란 건 ‘호의적인 시선’이 아니라, 애초에 판단의 렌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늘 맞거나, 틀려야 했다. 정답이거나 오답이었고, 중립은 흐릿한 회색으로만 이해되곤 했다. 회색을 마주할 때면 그것이 어둠에 가까운가 빛에 가까운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진정한 중립은 양 끝단의 합이 아니라, 분별 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무채색의 해방이었다.

나는 더 이상 ‘틀렸을 가능성’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기에 내 존재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 편견이 없는 세계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낭만적 공간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가 무력화된 지점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나를 가장 강하게 구속해 온 심판자의 시선으로부터, 곧 나 자신으로부터, 처음으로 조용히 풀려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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