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난 1년 4개월 동안, 나는 열 번의 이사를 반복했다. 그중 아홉 번은 단기 거처였고, 그 대부분은 타인의 삶에 조용히 끼어드는 방식이었다.
호주에 처음 도착하던 날, 나는 그저 몇 달 머물다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버려도 될 만큼의, 애착 없는 물건들만 골라 넣었다. 정착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시작된 체류는, 자연스레 나를 공간과 분리된 존재로 만들었다.
짐은 언제나 절반쯤만 풀린 채였고, 가구는 기능 위주의 최소한에 그쳤다. 떠날 준비가 삶의 기본 태도가 되었고, 내 일상은 늘 포개어지고, 다시 접혔다.
그러나 나는 본래, 공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사물의 배열, 조명의 온도, 섬세하게 직조된 텍스처, 그리고 느린 리듬으로 번지는 향기. 그 모든 감각적 요소들이 나의 정서적 균형을 조율하고, 내면을 안정시켜 왔다. 공간을 꾸민다는 것은 나 자신을 가꾸는 방식이었고, 나를 돌보는 가장 구체적인 언어였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은 그 애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비라는 절대적인 제약, 거듭된 이사, 불확실한 체류 조건. 그 모든 조건들이 나의 정주의 의지를 침식했고, 나는 서서히 존재론적 불안정성의 경계에 머물렀다.
처음 몇 달간, 이국의 풍경은 그 자체로 감각적 충격이었다. 버스 안을 울리는 낯선 억양, 진열대에 놓인 알 수 없는 브랜드들, 모든 것이 새롭고 이질적이었고, 나는 일종의 감각 수집자처럼 살았다. 그 시기의 나는 탐색하는 주체였고, 매일의 삶은 하나의 여행이자 실험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경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존재하기 위해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직관, 그 감각이 천천히 내 안에 침전되었다. 삶이라는 것은 머무르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밀도와 결을 갖기 때문이다.
학교 등록을 마치고, 2년간의 일정을 손에 쥐었으며, 마침내 ‘내 공간’이라 불러도 좋을 곳에 정착했다. 그 순간, 정착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피부에 와닿았다. 물리적 안정은 내면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고, 미뤄뒀던 일상은 다시 천천히 정렬되기 시작했다.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나를 다시 되짚었고, 한국에서의 나를 기억하며 조금씩 예전의 루틴을 되살렸다. 폴댄스, 피아노, 글쓰기, 소소한 취향의 복원. 그것은 단지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누구였는지를 되찾아가는, 자기표현의 감각적 회복이었다.
그 자신감은 내 일상을 다시금 낯설게 만들 만큼 큰 변화였다. 나는 내가 가진 자신감의 유무에 따라 정신적 밀도와 안정감이 극명히 달라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배움’이라는 움직임 속에서 비롯되었다. 나를 생동하게 만드는 건 결국,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와 마주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 정착을 결심한 순간의 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었다. 처음의 나는 모든 것을 지워야 한다고 믿었다. 기존의 익숙했던 취향, 말투, 생활 패턴까지, 과거의 나를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정착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나를 ‘새로 시작되는 호주’에 맞춰 넣으려 했고, 그 안에서 철저히 낯선 사람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완전한 백지화는 나를 견고하게 만들기는커녕, 되려 한 번 깊이 무너뜨렸다. 지워낸 줄 알았던 나의 결들이, 감추어진 채 뒤엉켜 있었고, 나는 내 안의 공백에 점점 침식되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맞물려 이사를 했다. 공간이 바뀌자, 나는 방향을 틀었다. 비우는 대신, 되찾는 일을 택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감각, 이전의 나를 구성하던 것들을 하나씩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새로운 환경 속에 조화롭게 중첩시켰다. 그것은 말하자면, 본래의 나와 새로 만들어질 나를 중화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 전환의 시기 동안, 가치관도 바뀌었고, 성격도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도 유연해졌다. 취향도, 말투도, 스타일도 새롭게 정립되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었고, 그 변화는 나에게 필연적인 진통이자 자극이었다.
앞으로도 변화를 향한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다만 이제는 방향이 다르다. 무조건 새로움만을 좇기보다, 그것이 내게 진짜로 스며드는지, 내가 그것과 함께 숨 쉴 수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 변화는 내게 있어서 정체성의 해체가 아니라 재구성이며, 선택과 수용의 반복 속에서 나를 더 단단하게 조각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전하기 위해선 반드시 정박할 한 곳이 필요하다. 흩어진 에너지를 모으고,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선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중심이 존재해야 한다. 그 중심이 내게 있어 ‘집’이 가지는 의미다.
나는 이중적인 기질을 지녔다. 낯선 곳을 향해 떠나고 싶어 하는 충동과, 집 안 깊숙이 자신을 은둔시키고 싶어 하는 본능. 역마살과 집순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 사이에, 나는 나를 살고 있다. 어쩌면 이 모순적인 구조야말로 내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리듬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덜 조급해졌고, 덜 두려워졌다. 언어는 더 유연해졌고, 나는 타자의 시선에서 조금씩 벗어나 내 리듬대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공간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그곳에 감각을 놓고, 리듬을 심고, 나를 투영하며 주체로서의 자리를 다시 짓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그 자리 위에 나를 다시 짓고 있다. 정착이란, 결국 나를 회복해가는 또 다른 방식이자, 나라는 존재가 다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공간적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