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면 이렇게 한가했었나 싶을 정도로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졸업 후 2년 반 동안 백수로 살았을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한가한지. 뭘 믿고 이렇게 한가로운지. 어쨌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보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는 것과 방 정리를 신나게 하는 것, 그리고 예전에 썼던 글과 기록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지금은 페이스북에 자리를 넘겨주고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지금의 스타벅스 급 열풍을 일으켰었던 캔모아와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싸이월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촌 맺기라는 기능이었는데, 이 시절에는 지금처럼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외국인들과도 페친을 막 맺어버리는 그런 단순한 구조가 아니었다. 마치 가족처럼, 그것도 일촌이라는 아주 가까운 관계로 자리 잡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여타 커뮤니티와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일촌명'을 정하는 데 있었는데 이 일촌명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이 일촌이 아주 친한 친구냐, 대충 아는 친구냐, 그냥 같은 반 친구냐, 모르는 사람이냐 등의 일종의 계급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그냥 같은 반 친구나 대학 동기였어도 이 관계가 조금 친밀해지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일촌명 변경을 통해 둘 간의 관계를 새로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신세기적 즐거움에 취해 우리는 모두 싸이월드 폐인이 되어 일상을 공유했다. 그 시절 나는 다이어리라는 기능을 통해 나의 생각을 끄적이곤 했는데 문득 스무 살의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또 어떤 큰 꿈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훑어보다 2007년 4월의 어느 날 이런 일기를 썼음을 발견했다.
'(...)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노래 부르는 아저씨를 만났다. 자기는 꼭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그 나이에 지하철에서 통기타에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건, 그런 용기를 가졌다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통기타에 노래 한 소절, 환하게 웃는 그 아저씨 덕분에 오늘 나도 많이 행복했고 즐거웠다. 아저씨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꼭 아저씨 꿈이 이루어질 거예요!'
그 아저씨는 나랑 일촌도 아니어서 이런 글을 볼 수 없었을 텐데도 저렇게나 오글거리는 멘트를 끝으로 일기는 마무리되었다. 오그라든 손발을 펴다 문득 든 생각. 만약 지금 저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벌써 단어부터 달라졌다. 저 땐 정겹게 '아저씨'하고 칭했는데 지금은 그냥 '사람'이다. 아저씨라고 하면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겨운 느낌이지만 사람은 어딘지 썰렁하고 냉정해 보인다. 그냥 이 사람 저 사람 부르는 느낌이다. 요새는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 텔레비전을 틀어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렇게 큰 감흥이 없기도 하고, 또 사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느라 누가 지하철에서 노래를 하든, 물건을 팔든 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문득 슬픈 기분이 든다. 나는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직 제일 철도 없고 문학도 전공했고 세상의 모든 감성팔이에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본성은 어쩔 수 없듯이 그 감성을 기꺼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했는데 그런 내가 이렇게 메말라 버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아주 살짝 눈물이 날 뻔했지만 그래도 지금에라도 그때를 생각하며 이렇게 나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기를 바라면서.
*이 브런치에 올라오는 에세이는 제가 첫 직장을 그만둔 2015년부터 써왔던 것들이라 계절 및 날씨 등등에서 현재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