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제목을 보고 바로 반페르시를 떠올렸을 것이고, 음란마귀가 낀 사람은 다른 걸 떠올렸을 것 같지만, 훼이크고 정말 내 몸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7S8iMW6HsA
최근에 이런 영상을 보았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내 몸 안에 수없이 많은 움직임과 상호 작용을 통해 내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현해 놓은 것을 보니 그냥 이 사회가 구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요 없어진 길이 붕괴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훨씬 마법 같은 세상인 듯하고, 이족보행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있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놀랍고 신비한 내 몸안에 존재는 물론 나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고 생각을 하며 행동을 합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아주 거대한 존재가 현미경으로 본다면 내 안의 존재와 다르다고 느낄지는 의문입니다. 저 역시 매일 시간이 되면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밥을 먹는 생활을 반복하죠. 특정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때때로 태만하기도 하는 모습을 거대한 존재가 본다면 이렇게 작은 존재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신기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어렸을 때 우주는 거대한 존재의 몸 안이고, 항성들은 세포 같은 존재, 우리는 그 안에 존재하는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일부 과학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왼쪽은 사람 뇌의 시냅스 사진이며, 오른쪽은 우주 은하단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물론 많은 보정과 가정을 적용한 이미지이겠지만 놀랍게도 둘의 구조는 비슷해 보입니다. 인간의 뇌 속 뉴런과 우주의 은하가 공통적으로 전체 질량의 30%를 차지한다는 공통점이 있을 정도로 닮았다고 하네요. 이러한 모든 내용이 진실인지 제가 검증할 방법은 없지만 실제로 아주 일부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어떤 생물 속의 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https://brunch.co.kr/@gjchaos0709/54
https://brunch.co.kr/@gjchaos0709/55
이전에 제가 쓴 글의 크기 비교를 보면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할 뿐 진실은 아닐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자의 첫 구절인 "북쪽 심해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떨치고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았다. 이 새는 바다의 흐름에 따라 남쪽 심해로 옮겨간다. 남쪽 심해란 하늘의 연못(天池)이다."라는 구절은 인간의 크고 작다는 기준은 상대적임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제한된 상상력을 깨버리는 말로 시작을 하게 됩니다. 장자의 내용은 비유와 상징이지만, 현대 과학의 스케일을 보면 이토록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숫자를 셀 때 만을 기준으로 만 배씩 단위가 변하게 됩니다. 만의 만 배는 억, 억의 만 배는 조, 경, 해 식으로 큰 숫자의 이름이 있는데, 보통 조 이상은 쓸 일도 거의 없고 모르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해 이후에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라는 단위가 있으며, 무량대수는 문헌마다 차이는 있지만 무려 10의 68승을 나타냅니다. 큰 수 못지않게 작은 수 역시 많은 단위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표현인 찰나도 10의 -18승의 단위라고 합니다. 특히 옛날에는 더 쓸 일이 없었을 이런 크고 작은 숫자의 단위가 왜 존재했는지를 알아보니, 인간의 제한된 상상력을 깨는 불교 사상의 영향으로 대륙의 호방한 숫자 단위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대륙의 기상이 발생한 것도 이런 표현이 많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쓰는 표현 중 "억겁의 세월"에 나오는 1겁의 의미는 "1천 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수물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는 시간", "둘레 사방 40리 되는 바위 위에 백 년마다 한 번씩 하늘에 선녀가 내려와, 그 위에서 춤을 추는데, 그때 선녀의 얊은 옷으로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양을 나타내는 말이 많은 이유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한 실체는 없다)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생각의 제한을 깨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대넓얕 붓다의 모두 까기 편에 나온 범망경에서 모든 견해에 대해 인간의 한정된 경험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붓다의 모습을 보면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붓다는 정말 뛰어넘은 무언가를 경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http://www.podbbang.com/ch/7418/?e=22250711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줄여서 지대넓얕 109회 쇼미더대화 - 붓다의 모두까기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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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주에 비해 한없이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실체가 없는 세상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허무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내 안의 작은 아이를 알아낼 수도 있고, 우주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기도 합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허황된 상상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어떤 것이든 상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삶의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치열한 현실의 삶이 중요하지만 가끔은 생각의 제한을 풀고 이상한 생각을 해보는 것을 권장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