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오늘은 제가 가끔 했었던 생각의 틀을 깨는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바로 평소에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반박해보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자를 보호하는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감정이 들지만 금기를 잊고 논리만 펼쳐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를 인류 공통의 생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생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치 독일 체제를 지지하는 논리로 우생학이 있습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끼리 교배를 하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태어날 확률이 높다는 유전학에 기반하여 생긴 논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저 논리 자체가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부모님이 공부를 잘했다면 자식도 잘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고, 잘생긴 부모 아래 잘생긴 자식이 나올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게 됩니다. 우생학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수한 유전자만 보존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하여 인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듣자마자 바로 거부감이 들겠지만, 나치 당시 많은 독일인이 자신들이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인종이며, 이 때문에 열등한 다른 인종은 필요가 없다는 말에 강렬한 지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인에 빙의하여 추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각 국가의 외국인들과 일을 많이 해본 편인데, 확실히 독일인은 대체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에 비해 열심히 일하고 빡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독일인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우수하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일을 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유럽인, 특히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인은 정말 너무 게으르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답답해한 적이 많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가 독일인이었다면 직접적으로 표출을 하지는 않겠지만 무의식 속에 유럽의 다른 국가 사람들이 좀 열등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큰 전쟁에서 패배하여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들보다 열등한 다른 국가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잘 사는 것을 보며 부당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생학이라 불리는 과학적인 근거를 마련해서 독일인의 우수성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쟁에서도 계속하여 영광스러운 승리를 이룩한 나치 정부에 열광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물론 우생학을 기반으로 우수한 유전자만을 남겨놓게 된다면 종의 다양성 유지를 못하게 되고, 인류의 멸종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정설입니다. 쉬운 예로 한동안 바나나가 멸종 위기에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는데, 현재 지구 상에 바나나는 케번디시 종밖에 없습니다. 우수한 품질의 가진 바나나 풀의 뿌리나 줄기를 접붙여서 번식시켰기 때문에 한 종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과거 대부분을 차지했던 바나나 종인 그로미셜이 파나마 병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했을 때 개량된 종이 케번디시이기도 합니다. 한 종류밖에 없기 때문에 치명적인 병이 돌면 언제든 쉽게 멸종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현재 코로나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인간을 멸종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은 유전적으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코로나에 잘 안 걸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증상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해 인간들끼리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인간을 멸종시키지는 못합니다.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을 생존케 하여 유전자 구성을 통일시킨 사회에서 코로나보다 더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필 통일시킨 유전자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돌게 된다면 인류는 바나나처럼 멸종될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하지만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우수한 유전자에게는 치명적이었던 병이, 과거에는 열등하다고 생각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에게서 활약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결국 인류는 피해는 입어도 멸종을 면할 수 있습니다.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이론으로 우생학은 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수한 유전자만을 보존하는 것이 생존에 불리하다는 증거일 뿐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의를 뒷받침해주지는 않습니다. 생각을 뒤집어서 만약에 우수한 유전자만을 보존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약자를 배척하고 없애는 것이 정의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약자는 분명 인간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전적 다름이 아닌 후천적 장애인의 경우 특별히 인간의 유전자 보존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우생학이 부정당했다는 이유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선택일 뿐이기 때문에 정의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약자에게 마음을 쓰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효율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편의 시설을 만드는 것에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공감능력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를 상대방의 상황에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특이한 특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는 잔인한 약육강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약자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좀 애매합니다. 최소한 저는 지금은 죽은 저희 집 강아지에게 인간, 혹은 인간 이상의 공감을 느낍니다. 많은 애견인들은 강아지를 사람 이상으로 생각하며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축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하지만 공감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도축되는 과정이 비교적 철저히 가려져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위해 공감을 차단하는 경향이 큽니다. 좀 더 나가 개미나 모기, 미생물, 혹은 생명체라 보기는 어렵지만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바이러스의 죽음에는 대부분 공감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간 한정이며, 인간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게 되는 일이 있다면 상당히 잘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여러 식물과 동물은 우수한 유전자끼리 접붙이거나, 종마를 키워서 우수한 말만을 기르는 등 우생학을 철저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전자 조작 역시 많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잔인하면서도, 유독 인간에게만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 약자를 보호하려 하는지도 애매합니다. 실제로 장애인 시설에 대해 NIMBY 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일이 생기면 쉽게 공감을 차단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보호하는 사회 역시 어느 이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 주로 만들어집니다. 어쩌면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일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아마 다양한 반응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반박을 하는 사람, 반박을 하고 싶은데 말문이 막히는 사람,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저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여기서 멈추지도 않고 계속해나갔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다고 제 생각이나 행동이 극단적으로 바뀌어 약자를 억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인 생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으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서로 토론이나 논쟁을 하여 생각을 해보는 방법도 있으나, 논쟁은 기본적으로 서로 이기려 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과 공격에 치중되는 경우가 많고,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집에서 이불 킥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일상에서 논쟁할 상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회사 직원들에게 이런 토론을 제안한다면 아마 별난 사람으로 전사에 소문이 날 것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혼자서 반박을 해보고, 그 생각을 또 반박해보고 찾아보는 것을 아주 가끔 해보면서 생각의 바운더리를 넓히려 하고 있습니다. 브런치에는 글을 쓰시는 분이 많으니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도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살짝 권유드리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