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정의롭다는 착각
전국에 오디션 붐을 일으킨 프로듀스 101에 등장한 Pick me 무대를 봤을 때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였습니다. 예쁜 소녀들이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기 위에 최선의 노력을 하면 거기에 순위를 매깁니다. 순위가 높은 친구들은 메인에 서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순위가 낮으면 무대 밖에서 누구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한 순간이라도 자신을 비춰줄까 혼신의 춤사위를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한 장면으로 설명해 주는 듯했습니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매정하고 다소 안쓰럽기까지 한 이 모습에는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공정한 경쟁에 여론이 들끓었죠. 시청자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순위이기에, 특정 인물을 더 오래 매력적으로 부곽 시키는 일은 쉬워 보입니다. 방송 내내 공정성 문제는 이슈가 되었고, 급기아 나중에는 투표 부정이 터져 관계자들이 구속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분노를 하였음에도 이미 정해진 순위가 변하지는 않았으며, 조작에 의해 억울하게 떨어진 연예인 지망생들은 아직도 기회를 찾아다닐지도 모를 일입니다.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밀리는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성공하여 복수하는 내용은 드라마에 상투적으로 나오는 클리셰*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공정에 화를 내고 용납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기에 여러 작가들이 상투적인데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사실 누구라도 정의롭고 바람직한 주인공이 되고 싶지, 주인공을 불공정한 수단으로 밟고 올라서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아무리 정의로워도 바뀌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떨어진 연예인을 구명해 봐도 순위는 변하지 않으며, 정치인을 백날 비판해도 투표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1표는 세상을 바꾸기에 너무 작습니다. 나의 정의감과 다르게 가는 세상에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로 바뀐 정의감은 문제를 만듭니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도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정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라며, 다르다면 비난을 합니다.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으면 본인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인터넷 댓글로 누군가를 죽인 사람도 자신을 합리화하며 정의로웠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죠. 누군가에게 정의로움은 누군가에게 불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타인의 생각을 마주하게 되면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분노의 언어가 들어가면 대화가 되지 않으며, 서로 생각의 골만 깊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대화가 없습니다. TV토론을 보면 서로 각자 할 말을 하고, 상대방 말은 흘려보내며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보입니다. 정치인은 수세에 몰리면 "정치 공세"라는 이상한 단어를 쓰며 전혀 논리 없이 말 같지도 않은 해명으로 넘기고 있으며, 더 수세에 몰리면 적반하장으로 화만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내라고 하면서 민주적인 상사인 척만 하고 결국 자신의 의견만을 강요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인터넷 댓글은 서로 다양하게 자신들의 할 말만 하고 있고,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따져 물으면 욕으로 답변을 할 뿐입니다. 보수 정치 성향이 강한 게시판에 다른 생각을 올리면 다짜고짜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며,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게시판에 다른 생각을 올리면 각종 차별적 언어로 비난이 도배됩니다. 사춘기 소년소녀는 그나마 부모의 잔소리를 귓등으로라도 듣지만, 이들은 조금의 피드백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반성이 없는 어른이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정의롭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이슈가 뜨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우르르 몰려가서 매질을 하며 자신의 정의감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합니다.
* 클리셰 : 진부한 표현 혹은 상투구를 칭하는 비평 용어. 원래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였지만 판에 박은 듯 쓰이는 문구나 표현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했다. [출처 : 영화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