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죄수의 딜레마
초기 자본주의에 영국은 어린이들까지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는 것은 교과서에서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기업가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직원들을 착취하며, 이를 해결할 방법은 몽쳐서 저항하는 것뿐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각광을 받았던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흩어진 상태의 노동자가 뭉치면 사실 어떤 자본가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과거 왕정 시대와 같습니다. 노예나 노동자의 비율이 언제나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그들이 들고일어날 경우 귀족이나 자본가는 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를 잠시 살펴봅시다. 공범으로 의심되는 두 명의 용의자를 따로따로 수사실로 불러 자백할 기회를 주며, 아래의 내용을 제시합니다.
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라면 두 사람은 모두 자백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과 상대방이 모두 침묵을 한다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상대방이 배신할 경우 오는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국민은 모두가 뭉치는 시도가 실패할 경우 돌아올 불이익이 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불의에 저항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질 것도 알고 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에 따라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는 친일, 독재 등의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할 확실한 불의가 있었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불의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들이 잘 사는 모습은 더더욱 불의에 입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머리가 좋은 정치인들은 계속하여 갈라 치기를 독려하기만 해도 국민들끼리 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상황을 즐깁니다.
끊임없이 착취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본주의 제도에는 대안이 존재합니다. 사실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 때문에 만들어진 측면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들이 뭉치기 좋게 노동조합의 권리를 헌법으로 인정하였으며, 각종 시민 단체를 지원하게끔 하였습니다. 자본가는 당연히 수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유인이기 때문에 이런 견제가 없으면 점점 더 착취의 방향으로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단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많지 않은 수단임에도 이런 단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과거 계급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상적 주입과 전략이 있었던 것처럼, 자본가를 비롯한 상위 계층은 자신들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이런 조직을 없애거나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는 당연한 조치이지만, 노동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각자 다른 정의감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네티즌들이 개인을 향해 비난을 하다 살인이 일어날 경우 그래도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며 반성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 해도 그 개인이 그렇게까지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집단을 향한 비난의 양상은 또 다릅니다. 집단은 다양한 사람들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비난할 거리를 잡기가 쉽습니다. 또한 어떤 집단이라도 모두 바람직한 사람들만 있을 리가 없으며 어떤 집단도 돈의 유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때문에 약자의 조직인 노동조합 역시 힘이 강해지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거나 부정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설사 그 노조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매우 좋은 사람들이고 최선을 다해 합리적으로 활동을 하려 한다 해도 도를 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본가와 손을 잡은 언론에서 이런 부분을 부곽 시키면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기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특정 노조가 매우 잘못하고 있다면 특정 노조를 개선하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노조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는 자본가가 부정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보다 노조의 흠을 훨씬 많이 비난하기 마련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격차가 많이 나게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덤비지 못하지만 비슷하거나 못한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는 것을 극혐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돈을 기준으로 촘촘히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뒤바뀔 가능성이 있는 레인지 내의 계금 사람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견제하지만,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쟁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기껏해야 악플을 다는 정도로 자존감을 세우며, 그들의 큰 잘못을 큰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 하며 자신의 정의감을 채웁니다. 돈을 기준으로 하면 높은 계급임에도 유독 연예인들에게 심한 악플이 많은 이유는 그들은 나보다 크게 잘난 것이 없는데 외모나 재능을 타고나서 잘 된 것이라는 착시에서 발생합니다. 그들에게 밟힌 자존감은 편의점이나 카페 알바생들에게 갑질을 하며 자신의 계급적 우위를 과시하며 풀게 됩니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자유를 행세하며 갑질을 하고 인터넷 댓글로 비난할 사람을 찾아다니며 허무한 심판자의 쾌감만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성이 발달했다는 21세기에 트럼프의 인종 차별에 열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보다 높은 계급 사람에게 덤빌 수 없어 무너지는 정의감을 다른 곳에서 회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계급이 나누고, 누군가를 무시하고 숭배하고, 여기저기 휘둘리는 세상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시대가 와도 어떤 형태로든 이런 경향은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최선일까요? 지금의 문제점을 조금이라도 해결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이승만의 1950년 10월 평양 탈환 연설 중 나온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