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사회

511 철학의 부재

by 평범한 직장인

과학에 관심이 많은 제가 우연히 요즘 교육 과정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에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표준모형까지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깊은 지식까지 들어있지는 않았지만, 제 나이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름만 알고 있는 지식을 요즘 학생들은 배우고 있습니다. 요오드가 아이오딘으로 바뀌는 등 요즘 교과서를 기성세대가 보면 모르는 내용이 넘쳐납니다. 세상이 정말 급격히 변하고 있죠.


maxresdefault.jpg 사이버 렉카 [유튜브 시리즈] - 소맥거핀 유튜브 발췌

책을 찾기보다는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는 시대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요새는 모르는 것이 나오면 유튜브를 찾아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유튜브나 블로그로 수익을 올릴 수 있기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콘텐츠로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콘텐츠 홍수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어그로를 끌어 많은 사람들이 봐야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자극적인 어그로를 끄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들도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정리할만한 절대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조금 이상하지만 메이저 언론에서 보도한 것이니 일단 믿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공신력을 잃어버린 언론이지만 아직까지 거대한 유통망은 유지하고 있으며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기에 수준 이하의 기사로 논란을 부추겨 조회수를 높이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 언론의 역할은커녕 많은 부작용만 남기고 있습니다.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은 모든 지성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과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학문을 하는 대학이라는 기관은 사회의 기준을 만들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하지만 학문이 발달하고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학자들은 예전만 한 권위를 가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과거 뉴턴 역학은 너무나 완벽하였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모든 진리를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우리가 아직 자연계에 모든 조건을 모를 뿐이지, 그 구동 원리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상당히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었으며 모든 비과학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학계에 흑체 복사*3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양자 역학이 생겨 버렸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기존의 원리가 틀렸음을 증명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과학자들은 언제든 이론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말하게 되었으며, 아무리 확실한 지식이라도 100%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반론에 열린 자세로 생각해 보는 학자들의 자세는 분명 한층 진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겸손해지자 수많은 사이비 지식이 기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과학자가 말하는 오류 가능성을 부각하며 수많은 유사 과학이 범람하기 시작했으며 창조 과학*4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종교적 문헌 내용이 더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보입니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지구온난화가 웬 말이냐는 트럼프의 트위터

더 큰 문제는 이를 바로 잡을 만큼 믿을만한 기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상아탑 역시 학교 순위를 올리기 위해 많은 돈을 필요로 하고, 돈을 많이 끌어 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가 오래이다 보니, 정부와 기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습니다. 소수의 학자들은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어기고 정치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두둔합니다. 또 다른 사례로 학자들 역시 정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정치인이 이용하기도 합니다. 학계에 매우 소수파인 기후 변화 위험이 없다는 설을 가지고 트럼프가 이용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죠.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신뢰를 잃어버렸고, 국민 대다수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사법 기관 역시 점점 그 권위를 잃도록 행동을 하고 있죠. 기본적으로 거리낌 없이 전관예우를 당연시하고, 돈 많은 사람에게는 화려한 스타 변호인이 투입되는 모습에서 과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기관인지 의문이 듭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네티즌의 행위의 기반에는 사법 기관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권력의 판결과 처벌을 믿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각자 진영을 나눠서 서로를 비난하고 있으며,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네티즌 수사대가 되어 신상을 캐고 사냥을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크게 벌어지자 외로운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는 커뮤니티의 성향을 만들게 되죠. 인터넷에 유명한 커뮤니티들은 이제 어느 정도 유저의 성향에 따라 분배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분탕질 치며 놀기 시작합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역시 내 성향에 맞는 영상을 기가 막히게 찾아서 계속 시청을 하게 만들려고 하죠. 자유롭게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주장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룹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방 속에 갇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내 시간을 빼가며 다른 생각을 해보고 논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특정 단체가 시위를 하여 자신의 출근길을 방해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불같이 화를 내지만, 오너 리스크로 망하게 생긴 자영업자는 오너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불매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저항하여 손해를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지지해 주지도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계급 속에 점점 더 묶이게 됩니다. 세상을 잡아먹을 것 같은 분노의 댓글 몇 개를 달면서 말이죠.




* 상아탑 : 속세를 떠나 조용히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나, 현실 도피적인 학구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 본래 구약성경 아가 7장 4절 "너의 목은 상아로 만든 탑 같고"라는 구절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과거에는 긍정적인 표현이었지만 현대로 들어오면서 몽상가를 이야기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이는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생트뵈브가 낭만파 시인 비니의 태도를 비평하며 쓴 데서 유래한다. 비니의 은둔 생활에 대해 생트뵈브는 '한낮이 되기도 전에 상아탑으로 들어갔다'라고 표현했다. [출처 : 나무위키] 보통 대학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 라플라스의 악마 :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제시한 가상의 존재, 혹은 이를 가정하여 실행된 사고실험이다. 뉴턴의 기계론적 결정론이자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이다. [출처 : 나무위키]


*3 흑체 복사 : 흑체에서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현상. 방출 에너지량은 절대온도의 네제곱에 비례하며, 평균 진동수는 절대온도에 정비례한다. [출처 : 나무위키] 흑체 복사 문제를 설명하려다가 양자역학이 탄생하게 된다.


*4 창조 과학 : 과학적 사실들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아브라함 종교 계열의 사이비과학이다 [출처 : 위키백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