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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509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법

by 평범한 직장인

이제는 정말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어릴 때 보고 머릿속이 정말 복잡했습니다. 어렵지 않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 국가와 사람에 대해 정말 다양한 각도로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시골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급의 급장이자 독재자인 엄석대와 서울에서 전학 온 모범생 한병태와의 충돌로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영화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지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엄석대가 독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이었음에도 복잡한 생각이 들어 통쾌하지만은 않았던 이 대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엄석대는 또래보다 2~3살이 많은 설정이며,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하는 대장에 알맞은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가 받는 수많은 특혜와 그가 하고 있는 독재가 잘못되었음을 대부분의 학생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엄석대 제국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한 학우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비난이 터진 것에서 이는 충분히 드러납니다. 잘못된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 왜 학우들은 복종을 하였을까요?




어린 시절 정말 무서워 보였던 홍경인 배우, 나중에 예능에서 촐싹대는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석대의 독재에 깔려있는 베이스는 공포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엄석대는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하며, 달려오는 기차를 정면에서 보고도 끝까지 피하지 않을 정도의 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임에도 주변 학교 중학생들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포는 대부분의 독재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합니다. "저 진영이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 "저렇게 돈을 풀면 나라 망한다", "저쪽이 잡으면 빨갱이 세상이 된다" 같은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이유는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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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석대가 직접 한병태를 응징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엄석대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반 학우들이 단합해서 덤비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를 잘 아는 엄석대는 교묘하게 정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계급을 나누고 높은 서열의 사람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면서 자신을 따르게 만들어 학우들끼리 뭉치지 못하게 합니다. 엄석대가 직접 손을 쓰는 경우는 없고 그 아랫사람이 항상 손을 더럽히기 때문에 증오는 서로를 향하게 되고, 엄석대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좋은 사람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힘 있는 아버지를 두고 공부도 잘하는 한병태가 전학을 오자 제국의 위기를 느낀 엄석대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를 견제합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를 굴복시키고 난 후에는 서열 2위 자리를 주면서 영원히 복종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역시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지배를 하던 국가가 지배를 받는 국가를 지배하는 방식도 서로를 갈라 치기 하는 방식이었고, 정치인들은 다수의 가난한 계층을 분열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각자 다양한 생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뭉치게 만드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뭉치더라도 각종 유인에 의해 배신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며, 얄밉게도 이런 사람들이 잘 사는 경우가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뭉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지역, 학연 등으로 묶어서 편을 만들게 되면 더더욱 뭉쳐지기는 어렵게 됩니다. 그럼에도 과거에 우리나라는 잘못된 권력에 대해 뭉쳐서 강하게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고 대통령 탄핵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는데, 사실 이는 "지금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인식에 대다수가 동의하고 행동해며 각종 분열 조장을 헤쳐 가나야 가능한 상당히 드문 케이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 탄핵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에는 빠르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만든 인터넷의 발달도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은 정말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과거처럼 정보의 독점이 어려워짐으로써 개개인을 억압하는 것이 그만큼 더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전파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져서 집단행동을 하기에도 더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하였고 국가나 상위 계급 사람들이 이를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오면서 자유와 평등이 더 신장되는 듯했습니다. 초반에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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