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
휴가 첫날, 모든 걸 아빠랑만 하려는 것 같더니, 담날부터 이 녀석은 다시 엄마바라기가 되었다. 소변을 보러 갈 때도 엄마를 부르고, 아빠가 안아주려 해도 엄마를 찾는다. 아빠는 안되냐고 했더니 눈치가 보이는지 엄마아빠로 말을 바꾼다. 아기가 여러 가지를 표현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더 많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 보인다. 과거에는 단지 안아주기만 하면 해결되었던 것이 점점 더 복잡한 요구사항으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아직도 많이 안아달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도 엄마에게 많이 안겼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었던 것 같다.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안아달라고 하지 않게 되더니, 또래의 여자 친구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지금은 아기를 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되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안아줌이 주는 위로를. 어느 나이가 되면서 안아주는 건 이성과의 므흣한 관계에서만 있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 센세이션 했던 프리허그 운동도 웬 수작질인가 싶은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런데 매일 말 못 하는 아기를 안아주며 느꼈다. 힘들어 쓰러지려는 사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안아주기밖에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말 못 하는 아기를 안아주면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나는 힐링을 느끼게 된다. 모두가 플러스가 되는 유일한 일이라면 좀 과장되었을까? 사실 어디 좋은 곳에 가서 누워있는다고 크게 힐링이 되는지 모르겠었는데, 나는 아기를 통해 힐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힐링이 아기를 키우며 생기는 고단함을 씻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사회에 안아주기가 너무 터부시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들어하는 여자를 힐링시켜 준답시고 안아주는 건 말이 안 되고, 남자를 안아주는 건 상상조차 안 해봤다. 어느 나이부터 정해진 여자친구나 배우자와만 안을 수 있게 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성 친구가 있지 않는 이상 안아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양에 비해 이성 친구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스킨십에 보수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쩌면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갓난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장 강력한 위로의 수단인 안아주기는 성적인 신호와 연결이 되면서 오히려 더 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외딴곳에 혼자 살고 있지만 돌아가면 안을 수 있는 아내가 있고, 안아줄 수 있는 아기가 있다는 것이 아마도 내가 심하게 힘들게 느끼지 않는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어려운 인생을 사는 이유가 안아줄 수 있는 가족, 그 외에 뭐가 또 있나 싶다. 지금 인생에서 너무나도 힘든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누군가를 안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우울하고 외로워하는 친구를 본다면 한 번쯤 가슴을 내어준다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