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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드는 사람 지민규 Jan 23. 2021

토요일 새벽에는 야식을 먹는다

아홉 번째 떠드는 글

토요일 새벽에는 야식을 먹는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도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온 새벽 한 시쯤에는 적당한 야식 한 끼를 먹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에서 '소확행'을 설명하며 말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에 버금가는 나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낮보다 밤을 훨씬 좋아하는 내가 직장인이 되어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내일 하루를 위해 평일 밤늦게는 얼른 잠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밝은 날 바빴던 것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밤 분위기를 며칠 안 되는 주말에라도 즐기고 싶어, 토요일에는 새벽 네 시는 되어야 잠에 드는데, 이때 알맞게 배부른 야식 한 끼가 꼭 필요하다. 맥주도 같이.


그러고 보면 처음 취직해 근성만으로 회사 다니던 20대 시절에는 새벽까지 야근하고 집에 들어와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스트레스 풀기도 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는 밤 10시 이후에 뭔가를 먹으면 다음 날 너무 피곤해져, 평일 늦은 시간에 무언가를 먹는 건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 새벽 한 시쯤은 일주일 중 내가 야식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 됐다.


남들 깎아내리며 웃겨볼 목적 없는 순한 예능인들만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다운받아 틀어놓고, 찜기에 깨끗한 물 붓고 쪄낸 만두 한 판이나, 어묵 몇 가지 넣은 우동 한 그릇, 아니면 양은냄비에 버섯 넣고 좀 덜 짜게 끓인 라면을 맥주 한 캔 두고 먹는다. 스트레스가 많은 어떤 날에는 매운 떡볶이에 치즈 잔뜩 추가해 주먹밥 몇 알 놓고 마찬가지로 맥주 한 캔 두고 먹는다.


주말 늦은 밤에 마련한 야식을 한 입 먹고 맥주까지 들이켜면 '고생스러운 삶이지만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생각까지 스친다. 평일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되게 느껴졌으면서 고작 야식 한 끼로 자존심도 없이 타협할 일인가 싶지만, 토요일 심야 깊은 시간에 먹는 야식에는 그럴 만한 감성이 있다.


배부르고 등 따신 이런 새벽에는
별달리 안 좋은 일이 내 삶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아무리 주말이지만 먹고 바로 눕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 가지고 있는 옷들 중 제일 편안한 옷을 입고, (마스크도 꼼꼼히 쓰고) 밖으로 나가 조용한 거리를 걷는다. 야식 한 끼에 따땃하게 데워진 마음으로 바깥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니, 월화수목금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속에 올라 있던 열이 식는 것 같다.


많은 인파에, 자동차에, 소음에 잔뜩 사나웠던 거리가 사람 한 명, 소리 하나 없이 한산한 것도 어딘가 복잡스러웠던 마음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한 30분 걸을까 하다가도 좋아하는 가수의 7집 앨범에 실린 첫 번째 곡부터 끝 번째 곡까지 다 들을 만큼 오래 걷게 된다.


산책을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작은 컵 하나를 사기로 한다. 바닐라맛으로 할까 스트로베리맛으로 할까, 무슨 맛을 고를지 잠깐 고민하는 시간마저 여유롭게 느껴진다. 집에 들어와 골라온 아이스크림 한 컵을 뚝딱 비우고, 양치하고, 샤워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바디로션도 치덕치덕 발라 부들하게 침대 안으로 들어간다.


스탠드 불 켜고 누운 침대 위에서 시간 나면 읽으려고 사둔 책을 좀 읽는다. 그러다가 브런치에 올릴 글을 좀 끄적여보기도 하고, 창문 넘어 도로에 어쩌다 한 대 지나가는 차 소리에 이유 없이 멍해지기도 한다. 사이사이 아직 안 자는 친구들과 별것도 아닌 것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는 카톡도 주고받는다.


주말엔 늦게 일어나도 괜찮으니까, 내일 또 하루 보내기 위해 잠을 재촉할 필요 없이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졸리어질 때 잠드는 새벽. 배부르고 등 따신 이런 새벽에는 별달리 안 좋은 일이 내 삶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이제 또 월요일이 오겠지만, 이런 토요일 새벽도 다시 올 테니까 당장은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심되고 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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