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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드는 사람 지민규 Dec 29. 2020

한 해의 끝에서 하얀 눈을 본다

여덟 번째 떠드는 글

아주 오래전 겨울 스위스를 여행할 때 찍었던 눈 내린 스위스 풍경.

시월 중순 즈음부터 회사 일이 바빠지기 시작해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어떻게 옮겨가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겨울 외투 세탁 맡길 타이밍을 놓쳐 남들은 롱패딩 입을 때 나만 혼자 가을 외투를 한 주는 더 입고 다닐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몇 주 전 주말에 내린 첫눈도 주말 출근 위해 알람 소리 듣고 깨어나 씻기 전 멍한 정신으로 1분 정도 본 게 다였다.


두 달 넘게 이어진 바쁜 회사 일이 며칠 전 끝났다. 그간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쥐고 있는 일이 모두 정리되거든 눈이 내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때맞춰 조용히 눈이 내려준다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창밖에 눈 내리는 모습만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얼마 남지 않은 올 한 해가 저절로, 차분하게 정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은 내 기분 맞춰 내려줄 생각이 딱히 없는지, 내가 사는 지역은 12월 31일까지 눈 소식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주 전 첫눈 내릴 때 30분이라도 짬을 내 창밖에 내리는 눈을 좀 쳐다볼 것을. 아쉬운 마음으로, 아주 오래전 겨울 스위스를 여행할 때 찍은 사진을 모아둔 폴더를 오랜만에 열어, 눈 내린 스위스 풍경이 담긴 사진이나마 차례로 넘겨봤다.


그러다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그림 '눈 내린 루브시엔느'가 문득 떠올라, 구글에 검색해 노트북 화면 가득 열어두고 얼마간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뒤이어서는 좋아하는 가수가 몇 년 전 겨울 공연에서 말해준 크리스마스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까지 챙겨보고 나니, 어느새 나도 펑펑 눈 내리는 풍경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하다.


눈이 내리는 것은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인데, 눈은 사람에게
유달리 특별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다.
하늘에서 땅으로 세차지 않게 떨어지는
하얀 조각들이 가진 서정성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분주했던 마음들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코로나19로 그리 크게 나지도 않는 연말 분위기 속에서 어딘가 외로운 마음이 들 때, 가려고 하는 한 해를 보내는 것이 아쉽고 다가오는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 두려울 때, 자꾸만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정제된 기운이 필요할 때, 자연 그대로의 고요한 순수를 간직한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힘을 얻어본다.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시를 공부하며 배운 '눈=순수' 공식의 영향인가. 눈이 내리는 것은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인데, 눈은 사람에게 유달리 특별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다. 하늘에서 땅으로 세차지 않게 떨어지는 하얀 조각들이 가진 서정성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충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분주했던 마음들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마음속에서 헤매던 많은 생각들이 저절로 제 자리를 찾아가 앉는 것 같은 기분.


진짜 눈을 좀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코로나19만 아니었어도 대관령 어디 높은 데라도 올라가 혼자 눈 내리는 풍경을 좀 보고 왔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니 선택한 것이지만, 오래전 내가 찍은 사진 속 눈 내린 스위스 풍경과 좋아하는 예술가가 남긴 눈 내린 풍경, 좋아하는 가수가 알려준 영화 속 눈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으로도 서운하지 않게 마음이 찬 듯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시끄러운, 이런 한 해의 끝에서도 새로운 계획들은 야망 넘치게 세워진다. 이런 시국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해에 새로운 계획을 그려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다가오는 해에 새로운 것들을 몇 가지 계획하고 있다. 회사 일도 더 열심히 해볼 생각이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더 적극적으로 가져볼 생각이다.


새롭게 밝은 해에도 너무 많이 흔들리지 않고 나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나아갈 수 있기를 하얀 눈에 빌어본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또 막연한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제된 기운이 찾아가기를, 그래서 지쳐 있는 마음에 아주 조금의 힘이라도 되기를, 다 괜찮아지기를, 또한 하얀 눈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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