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나는 호기심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살았다. 지금은 외형적으로 시의 규모를 확장해서 남제주군까지 서귀포시라고 부른다. 당시에는 한라산 바로 아래의 좁은 부분만이 서귀포시였고, 80년대의 서귀포시는 작은 지방 도시였다. 2층짜리 아울렛에 ‘백화점’ 간판이 걸려 있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매일 같은 풍경과 비슷비슷한 사람을 보고 지내는 지루한 나날에 이따금 작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출현이 그랬다.
하얀 투피스와 유리 스타킹, 하얀 구두. 머리에는 크고 둥그런 모자를 썼다. 손에는 하얀 레이스 천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양산을 손에 들었다. 마치 영국 왕실의 고 다이애나비 같았다. 누구라도 그런 복장을 하고 있으면 눈에 띌 테지만 그의 모습은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마성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귀부인 복장과는 이질적인 그의 생물학적인 성(性) 때문이었다. 그는 남자였다. 아니 그녀라고 불러야 할까?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 분명하지만, 여기서는 성별에 따른 호칭이 아닌, 보편적으로 사람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써 ‘그’라고 부르겠다.
당시 우리 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빵집, 사진관, 팬시점, 시계방 등이 있었는데 가게마다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는 가게 앞 인도에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강시 놀이도 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놀았기 때문에 그의 모습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항상 같은 곳에서 등장했다. 우리가 노는 인도의 제일 끝에서, 마치 패션쇼의 모델처럼 인도를 무대 삼아 걸어온다. 처음에는 화려한 복장이 눈을 사로잡았다. 얼굴을 확인하면 곧 그의 성별에 모두 경악한다. 기존에 믿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에 차이를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 차이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각자 불일치를 해소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보지 않으려고 했고, 누군가는 남자처럼 생긴 여자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저런 사람도 있는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욕을 했다. 이런 상황에 제일 의연한 것은 그였다. 그는 모든 반응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허리를 곧게 피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딛으며 산책을 즐겼다.
그는 아주 이따금 나타났고 세 차례 방문한 뒤로는 더 이상 우리 마을에 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다른 지역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보통의 성인 남자처럼 지내다가 마음속에 뭔가 소용돌이 치면 예쁜 옷을 입고 장신구를 차고 다른 마을로 이동해서 거리를 거니는 것이다. 여성의 복장을 하는 남자를 좋은 시선으로는 보지 않으니 그의 외출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말이지만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 말이 있었다. 남자가 눈물이라고 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은 오로지 태어날 때,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세 번 만이라는 것이다. 남자라고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문장 때문에 남자들은 슬퍼도 외로워도 감정을 숨기고 혼자 끙끙 앓아야 했다. 혹여나 눈물을 보이면 ‘계집애 같다’고 손가락질받았다. 남자에게 ‘여자 같다’는 최고의 비난이다.
사회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과 남성의 모습을 규정한다. 여성에게는 입을 가리고 웃고, 다리를 모으고 앉고 수줍은 모습으로 대답하라고 한다. 남성에게는 감정을 내비치지 말고 사람들을 이끌고 누구와도 겨뤄서 이기라고 한다. 이 편리한 이분법 때문에 사람은 자기 안의 모순을 제거하려고 전전긍긍한다. 자기답게 살라는 풍조가 나타난 지금도 기준이 약간 느슨해졌을 뿐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30여 년 전 나는 호기심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나에게 그는 더 이상 여장을 하는 이상한 남자가 아니다. 뛰어난 패션 센스와 귀부인 같은 몸짓이 더 기억에 남는다. 지금 60대가 되었을 그는 어떻게 지낼까? 부디 눈치 보지 않고 내면의 우아함을 맘껏 뽐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