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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an 25. 2021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5

#시조는 윤리적 #문학은 교훈이 있어야 한다 #시를 쓰면 인격이 완성된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5
시조는 윤리적이어야 한다!


 

   시조는 '윤리적'이어야 한다. 문학은 윤리적이어야 하고 교훈(가르침)이 있어야 한다(또 궁서체). 이 역시 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당연히, 아니올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배우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교과서로만 문학작품을 접했던 한국 문학 교육의 폐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교육의 사전적 정의처럼, 문학작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교훈)이어야 하고 기술이 되어야 한다. 즉 무언가 효용(쓸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본격적으로 시조의 윤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지난 매거진 복습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는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잘하는 아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이제 시가 더 이상 1인칭 독백의 장르가 아니며, 시인은 시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시적 주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그동안 '화자' 또는 '자아' 등으로 말해왔는데, 이들은 시인이 아니다! 이제 '화자=시인'을 잊으시고, '화자≠시인'을 기억해주세요!!

   따라서 윤리의 문제는 간단해진다. 시가 윤리적일 필요가 없다!(두둥!!) 시인이 윤리적이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 시가 윤리적이지 않다고 해서 시인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시의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에 쌍스런 말들이 남발하고,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문장들이 보이면, 시를 그냥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시인지, 미학과 가치가 있는지는 우리가 따져볼 문제가 아니다! 싫으면 그냥 pass. 시인의 윤리 문제는 상식과 도덕이 통용되고 합의된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따져 물으면 될 것이다. 시에서 시인의 윤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윤리는 도덕책에서 찾으시길. 시에서 왜 윤리를 찾나요? 시는 예술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이것! 시조와 시인을 같은 선상에 두고, 시조를 윤리적 혹은 공리적으로 만들려는 것 문제다. 작품에 고결한 정신 혹은 (매우) 윤리적인 삶의 자세가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시조를 매개로 시인이 그것을 이루려는 것'은' 문제다. 한국에서 삶의 도(道)를 깨우치고 수양하는 전통적인 '문(文)'의 개념에서 '문학(literature)'의 개념(이광수)으로 넘어온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조를 정서의 영역보다는 윤리의 영역에 더 가치를 두려는 모습은 과연 옳은 것인가. 쉽게 말해, 자신의 이상향 혹은 자신의 윤리적 이상을 작품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 예술은 작가의 윤리성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어야 한다. 물론, 글을 쓰면 쓸수록 사람은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가긴 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인격이 갖춰지는 것과 그것을 글로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쉽게 말하면, 유단자는 쉽게 주먹을 쓰지 않는다. 양아치들이나 쉽게 주먹을 뻗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매우' 교훈적이고 바른 윤리를 보여주는 작품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작품을 쓴 사람은 매우 윤리적(인 척하는구나)이구나! 그것이 바로 작가가 노리는 것이다! 어익후! 월척이구나! 걸려들었네!! 이는 앞서 말한 것과 정반대로 작가가 '화자=시인'의 등식이 유지되도록 강요하면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 이런 윤리적인 생각을 하는,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이다. 설령 그 작가가 정말 윤리적으로 흠결이 없는 매우 바른 사람이라고 해도 작품에 '잘난 체'를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 바로 돈돈돈!!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생각해보자. 플라톤형에 따르면, 시의 모방은 진리와 무관하며, 중요한 것은 폴리스에 적합한 시민으로서 양육되고 길러지는 '사회적 유용성'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폴리스에 필요 없으니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문학작품 또한 사회적으로 규정한 유용성(쓸모=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 우리 한국은 플라톤형의 시인추방론이 통하는 세상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쓰지 말아야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말이다. 국문과에 갓 입학한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한 선배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국문과는 굶는과야. 돈 벌 생각은 하지 마. (그냥 술이나 마셔! )



현재 각 대학교의 국문과는 통폐합되고 있다. 졸업생 취업률에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송합니다ㅠㅠ


시인의 윤리가 아니라 시의 윤리를 따질 것


   따라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윤리적이다'가 아니라 '시가 윤리적이다' 또는 '시가 윤리적이지 않다'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로 시는 메시지 혹은 주제를 먼저 고르고 거기에 맞는 대상을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적 대상에 대한 진술이 먼저 발생하고, 그 말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루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윤리의 문제'는 대상에 대한 진술이다. 이 진술 방식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통해 윤리 문제를 따져볼 수 있는데, 대략 시가 취하는 진술 방식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동일성(나와 너)의 문제

   둘째, 자연 예찬의 문제

   셋째, 현실 비판의 문제     


   첫째, 동일성의 문제. 지난 매거진에서 서정의 문제와 함께 동일성의 문제를 살펴봤으니, 간단하게 살펴보고 후딱 넘어가자. 아주 쉽게 동일성의 가장 큰 문제를 설명하면, 타인을 내 멋대로 해석한다는 점인데, 타인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폭력이다!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일성 문제 중 대표적인 사례 하나만 꼽자면,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을 예찬하고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일이다! 노숙자, (폐지 줍는) 노인, 외국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등 그들의 삶에서 고통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지만, 그들의 척박한 현실을 따뜻하게 품을 줄 알고 고발할 줄 안다는 식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마지막에는 '그래도 해는 뜬다', '그래도 봄은 온다'는 식으로 아주 쉽게 그들의 아픈 현실과 고통을 기화시켜버리는 일은 매우 옳지 않다!

   어설픈 동정심은 죄악에 가깝다. 그들을 연민하는 시선에 이미 자신이 그들보다 나은 환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연민할 줄 안다는 윤리적 우월감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다. 시선은 그 자체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즉, 시의 소재로 그들을 (아주 쉽게) 소비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아픈 현실에 공감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정말로 그들을 품고 싶다면, 함께 아파하는 시를 써야 한다. 부디 손쉽게 희망을 말하지 마시길.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말할 수 없다. 희망 역시 마찬가지. 싸구려 동정은 오히려 그들을 욕보이는 일이다.


   둘째, 자연 예찬의 문제. 이른바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자연 순리에 대한 예찬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특히 시조가 고색창연하다고, 젊은 사람이 하는 예술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시조는 음풍농월이지!! 그러나 자연은 끝내 이름 붙일 수 없고, 필멸자인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신성함의 자리, 즉 '숭고(sublime)'를 경험하게 되는 우리 인식 바깥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의 절대성, 신의 자리, 신성함을 너무 쉽게 예찬하는 것은 그만큼 사유가 게으르다는 뜻이기도 하며, 또한 그것을 쉽게 말하는 것은 동일자로 환원시키려는 폭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자칫 잘못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세계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또한 어렵다.


"시몬아 너는 아느냐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제발 자연을 쉽게 쓰지 말자. 자연과 피 터지게 싸워도 시가 나올까 말까 한데 말이다.


   셋째, 현실 비판의 문제. 일반적으로 시조시인들은 시조(時調)라는 명칭이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임을 알고, 시조가 어떤 장르보다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절가조'라는 말은 조선 영조 때 이세춘이라는 가객이 단가에 곡조를 붙여 부른 일종의 '유행가'라는 말에서 연원한 것인데, 현재 시조시인들은 그 말을 '현실비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착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 현실에 대한 예민한 반응과 비판의식을 자유시와의 변별 지점으로서 시조의 '임무' 혹은 '역할'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시조 자체에 대한 천착보다는, 자유시와 따로 구별하려는 차이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현실과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참여-예술 혹은 현실참여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미 질서 지워지고 위계화되어 있는 하나의 '선택지'를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한 이데올로기, 보수 혹은 진보 계열을 공격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사회 현실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점 중 채택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우리는 예술 혹은 미학에 복무하는 문학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학작품이 치열하게 현실에 응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미학적 성취도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쉽게 말해, 시의 현실 참여는 곧 미학(문학성)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과 미학의 문제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예술이지, 정치 사회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의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한다. 그것은 바로 미학이다. 미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 참여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김수영 시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 중 많이 회자되는 구절이 있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시의 정치성 혹은 시의 현실 참여는 반드시 미학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인이 추구해야 할 것은 미학이다. 여기서 미학(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시를 감상하면서 해야 할 일이고, 시를 쓰면서 시인이 해야 할 일이다. 부디 독자와 시인 모두 부지런해지길. (나도 부지런해지고 싶다!!)


그럼, 시조의 윤리는 무엇인가?


   시와 시조에 대해 윤리를 묻는 것은 시인의 윤리를 가늠하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은 이제 당신이 이해하셨을 것 같다. 물론 동시대의 여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시인의 삶에도 중요한 것이다. 다만, 시인의 윤리가 곧바로 시의 윤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학작품 중 특히 시조의 윤리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비로소 시조라는 특수성, 시조에만 존재하는 '정형성'을 언급할 때가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조의 정형성을 지키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과의 긴장, 그 긴장 자체가 곧바로 시조의 힘이자, 시조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의 ‘시조다움’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는 개별 창작자들의 의식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시대가 ‘시조다움’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좀 더 어울린다고 가정되는, 자유시는 '몽타주'의 방식으로 시대의 모습들과 징후들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장면과 장면의 중첩과 충돌에서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특이한 목소리가 출현한다. 하나의 대상을 보고 언술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술들이 하나의 대상이라고 간주되는 모자이크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조는 마치 20세기 김동인의 단편소설처럼 하나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체를 환기시킨다. 예컨대, 김동인은 인생의 작은 단면이자 하나의 사건인 '감자'를 둘러싼 복녀의 투쟁을 통해 인간 본질의 문제를 다룬다. 이처럼 시조는 각 음보와 각 장과 각 구처럼, 부분의 합이 전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짧은 시행으로 이 세계 전체를, 우리 삶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은 한다. 시조도 마찬가지. 짧은 3행으로 우주를 담아야 한다.


   따라서 시조가 정형성이라는 '오래된' 형식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지, 이 세계를 잘 담고 있는지가 곧 시조의 윤리가 된다. 시조가 자유시의 윤리와 비슷한 면모를 보이지만, 다른 점은, 그래서 시조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형성이라는 긴장을 끝내 놓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시대는 정형성을 용납하지 않지만, 시조시인은 정형성 안에서 항상 새롭게,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시대와 욕망의 리듬을 쫓아가기 위해 바빴고, 이제 지쳤다. 이제부터 시조는 시대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고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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