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4
시조는 서정시여야 한다!
시조는 '서정시'어야 한다. 고로 서정시가 아닌 시조는 시조가 아니다(궁서체). 이는 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서정의 문제가 드디어 뙇! 여기서부터는 각 잡고 써야 한다!! 시대를 살피면서 문학 장르 시라는 것에 대한 기존의 정의와 선입견을 모두 흔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 꽉 잡으세요. 달립니다!!
한국시를 정의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자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흔들리면 안 되는) ‘서정’이라는 개념은 매우 혼란하다. 시 장르를 일컫는 서정과, 시의 하위 장르로서의 ‘서정시’가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정’, ‘서사’, ‘극’이라는 <문학 장르 3분법>에서 말하는 ‘서정’은 서사적인 것, 극적인 것과 속성상 차이를 갖고 있을 뿐,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의 하위 장르로서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나누고 이렇게 분류된 시가 있다고 믿는다! 자 여기서 문제. 한국에 서사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극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답부터 말하자면, 서정, 서사, 극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으므로, 누구나 마음대로 서정적인 시, 서사적인 시, 극적인 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답니다!! 물론 맞고 틀리고는 본인 책임.
다만 상위 장르의 서정시는 고대로부터 문학 일반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17세기 이후로 서구에서 문학의 하위 양식으로서 ‘시’가 등장하면서 약간의 혼란이 가중된 것은 사실이다.
텔레스형, 왜 헷갈리게 문학을 나눠놨어? 다들 엄청 헤매고 있어!!ㄷㄷㄷ
물론, 시와 소설, 시와 에세이는 전혀 다른 장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서 우리가 쉽게 동의하는 것이 ‘시=서정시’라는 등식이다. 이에 따라 ‘서정(抒情, lyricism)’을 둘러싼 E. 슈타이거, W. 카이저, D. 람핑, 조동일, 김준오 등의 대표적인 논의를 살펴보는 일이 반드시 요청되지만, 이들의 논의는 결국 시와 ‘서정’을 일치시켜야 하는 순환 논리로 귀결될 뿐이며, ‘시=서정시’라는 등식은 특히 모더니즘 이후 현대시를 포괄하는 데 있어 한계를 보이고 있다. 시라는 장르에 있어 당위처럼 여겨졌던 ‘서정’, ‘서정시’라는 개념은 이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시대적 요청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서정시’라는 이데아 혹은 무의식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써 내려간 작품을 서정시라 보고, 그와 반대항에 위치한 것을 ‘反서정시’ 혹은 ‘(서정시가 아닌) 실험시’로 본다. 여기서 서정시 여부를 나누는 기준이 바로 ‘전통’인데, 권혁웅 평론가에 따르면 전통 서정시를 지탱하는 것은 “① 말의 질료성에 대한 배려. 율격을 위해 시인의 독자적인 발언을 희생하는 것. ② 중성화된 이미지에 대한 편향.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 주체의 개입을 가능한 한 차단하는 것. ③ 시적 관습에 대한 존중. 어슷비슷한 대상과 구문에서 가능한 한 일탈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전통 서정시가 아닌 작품은 이미 한국문학의 태동기에도 출현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 이상,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 부분(조선중앙일보, 1934. 7. 24.)
이태준의 소개로 발표된 이상의 연작 <오감도>는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의 투서가 빗발치면서 연재가 중단되었다. 소위 물의를 일으킨 것인데, 그는 기존의 시라는 개념을 전복하는 작품을 보여주면서 시가 무엇인지 재확인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기준이었는데, ‘시적인 것’과 ‘시적이지 않은 것’의 기준점이 바로 ‘서정성’이었고, 이상은 이 기준점 자체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후 한국의 현대시는 ‘전통-서정’ 계열과 ‘현대-실험’ 계열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타자로 인식해가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사를 실천해갔다.
전통 VS 현대, 서정 VS실험은 곧 세대 갈등이 되었다. 라떼는 말이야 VS 드랍 더 비트!
서정이라는 근원 혹은 진리
그런데 말입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시단에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미래파’ 혹은 ‘미래파 논쟁’!! ‘이질과 혼종의 힘’을 가진 미래파라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이 던진 파문은 2000년대 이후 한국시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확고부동했던 ‘서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미래파의 반대쪽 계열인 전통-서정 계열은 미래파의 타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오히려 ‘조선 문단’ 때보다 더 보수적인 ‘전통’을 지키게 되었다. 마치 이상의 <오감도>가 발표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2000년대 한국시 문단은 장석원, 황병승, 김민정, 김행숙, 김언, 이민하, 이장욱, 김경주, 조연호 등을 비롯한 미래파를 옹호하는 입장과 전통적인 서정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양분되면서, ‘서정/비서정’, ‘동일성/비동일성’, ‘주체/탈주체’, ‘리얼리즘/환상’과 같은 대립쌍과 더불어 기성세대와 미래파 세대 간의 ‘세대론’으로 전개되었다. 난해한 어휘들, 생경한 언어들이 마구잡이로 출현했고, 시도 무척 길어졌다. 그만큼 현실이 엉망이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거겠다!!
혼란하다 혼란해. 한국시에 혼세마왕이 출현했다!!(이말년 웹툰)
물론 권혁웅은 미래파를 동인(同人)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시인들의 새로운 문법과 수사에 주목한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문단연령론과 문학세대론으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여기서 문제의 가장 핵심은 주체의 동일성, 혹은 자아의 동일화인데, “문제는 1인칭이었고 그것의 전제주의”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지적처럼 동일적 주체를 내세우는 기존의 전통 서정시에 대한 반성은 곧, ‘서정’을 회귀해야 할 무엇, 되찾아야 할 무엇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서정시’야말로 근원적 감각을 잃어버린 채 나날의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직도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언어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서정시가 근원적으로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하려 한다는 것은,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의 통합적 국면을 꾀하고자 하는 성격이 ‘서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유성호, <서정 논의의 동향과 쟁점>, <한국근대문학연구>, 2017, 246~247쪽)
총체성이 무너진 현대, 아우라가 상실된 현대에서 서정이 ‘본질’ 또는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언어 형식이라는 유성호 평론가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와 첨단 과학의 발달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주체는 세계와 불화하거나 세계로부터 소외받을 수밖에 없으나, 그 구원의 가능성을 서정에서 찾고자 했다. 이제, 첨단 기계 문명 속에서 인간 스스로 자기 존립의 근거, 자기의 존재성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서정은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내야 했다. 실존적 위기, 인간관계의 상실과 같은 현시대의 문제 앞에서 서정의 가치가 더욱 돌올해진 것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서정은 근원, 진리, 이데아가 되었다.
그렇다면, 기존의 서정이라는 개념 중 크게 문제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주체와 대상의 서정적 혼융”(슈타이거), “자아의 독립적인 표현”(카이저), “세계의 자아화”(조동일),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김준오)이라는 그 유명한 서정시에 대한 정의들에서 알 수 있듯이,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가 서정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였다. 대체로 논자들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특히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주체가 대상을 자기 논리로 환원시킴)에서 서정시의 핵심을 찾는데, 이제 이 동일성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미래파 논쟁 이후 ‘현대-실험’ 계열에서 문제 삼는 것은 ‘서정의 권위’(이장욱)다. 데리다, 라캉, 푸코 등의 후기구조주의자들에 의해 근대적 주체, 동일성의 주체를 비판하면서 차이와 타자의 문제가 급부상하면서, 문학의 영역에서도 동일자의 원리로 환원하는 문제에 다양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은유가 사물의 차이, 나와 대상의 차이를 폭력적으로 동일화한다는 ‘서정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비판을 적극 옹호한 2000년대 ‘미래파적’ 현대시 이후, 이제 ‘화자=자아=시인’이라는 등식은 해체되었다!!
서정시가 아닌 시는 없다!
시는 더 이상 1인칭 독백의 장르가 아니다(궁서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시인이 많을 것이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일반 사람(시인이 아닌 사람)은 1인칭 독백의 장르로 시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단호하게 놉!! 그동안 시에서 말하는 자를 화자(자아)라고 말하면서 곧 화자를 시인으로 보았으나, 시인과 화자는 같지 않을뿐더러, 현대시에서 시인은 한 시집에서, 하나의 시에서 다양한 화자를 가지고 ‘논다’. 다시 말해 시인은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화자를 조종하는 것이며, 연극의 배역을 쓰듯 시인은 다양한 인물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게 하며 말을 하게 한다. 시에서 말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종하듯, 시인은 캐릭터를 조종하고 역할을 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이제 가면을 쓰듯 타인이 되어보는 것을 넘어, 타인으로 살아보면서 타인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정서에 깊이 가닿으려 한다. 그동안 동일화의 원리로 타자 혹은 사물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했다면, 이제 시인은 노동자, 여성, 미성년자, 퀴어 등 다양한 계급,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약자' 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는다. 이제 시는 시인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말하는 사람, 목소리를 내는 사람(시적 주체)이 시를 끌고 가는 것이다.
자 여기서부터 시조의 문제가 불거진다! 시조를 1인칭 독백의 장르로 보고 그래서 동일성의 원리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며 품평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자신의 시선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떠나서, 시조라는 문학 장르를 계속 폭력적인 장르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잠깐이라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역지사지'라는 말은, 시조에도 적용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 그래서 내가 피부로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체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윤리가 아닐까.
문학은 타인의 삶을 경험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문학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정시'라는 개념도 불분명하다. 서정시가 아닌 시도 있다는 말인가?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실험적이고,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해서, 서정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시는 서정시다. 다만, 서정성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그런 것의 함유량이 많고 적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하고 실험적이며 감정이 1도 없다고 해도, 그것 역시 서정시다. '서정(抒情)'이라는 말 그대로 인간의 마음을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로봇(AI)도 시를 서정적으로 쓸 수 있는데 말이다.
서정과 서정이 아닌 것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서정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이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기적인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