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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an 04. 2021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3

#시조는 오래된 형식 #새 술은 새 부대에 낡은 술은 낡은 부대에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3
시조는 오래된 문학 형식이다!


   이방원&정몽주가 고려말 조선초 사람이니 못해도 13세기 말~14세기 초부터 시조가 시작된 것이니 오래되긴 했다. 중국의 절구는 7세기 당나라 때부터, 유럽의 소네트는 르네상스 시기인 14세기부터, 일본의 하이쿠는 16세기 시인 바쇼로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했다. 세계 대표 정형시를 연식으로 나열하면 절구-시조-소네트-하이쿠 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하이쿠와 시조만 유일하게 현재까지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다. 절구와 소네트는 거의 유물급으로 전락해 버렸고, 시조도 머지않았다. 하이쿠는 일본에서 여전히 전국민적으로 인기가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하이쿠를 즐기는 사람(하이진排人)은 500만 명 이상이며, 전 세계적으로 800만 명 이상 하이진이 있다고 한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웠으니, '엄마 친구 아들' 하이쿠와 비교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는 시조의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으니, 신라의 향가나 조선의 경기체가, 악장 등과 같이 유물급의 문학 장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교과서나 이런저런 곳에서 접하는 시가 죄다 '고시조' 혹은 '고시조스러운 시조'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2019년 12월 31일까지 인류가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이 8,836기이고 현재 5,000여 기가 지구를 돌고 있으며, 2,000여 기가 현재 작동 중이라고 하니, 이런 최첨단 시대에 유물이 웬 말인가! 4차 산업혁명에 시조라니!

  시대는 점점 최첨단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이세돌 9단도 AI에게 바둑을 졌고, 평소라면 10년 걸릴 코로나19 백신도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만들어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시조는 과연 현시대와 어울릴까? 그래서 걸핏하면 시조단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주제에는 '현대성'이 꼭 붙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나 보다. 현대인의 감정을 노래하면 당연히 현대성을 갖는 것 아닌가? 왜 현대성을 자꾸 운운하지? 시조가 오래된 형식이라는 것을, 그래서 문제라는 것을 시조단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쓰기는 마치 칼로 총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그래서 시조단이 머리를 쥐어짠 끝에 최근 등장한 것이 다음의 2가지 해법이다. 하나는 시조가 소통불가, 난해한 자유시에 대한 대안 혹은 처방전이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SNS시대에 짧은 시조가 맞춤 장르라는 것. 전자는 지난 매거진에서 말했고, 후자를 생각해보자. 과연 시조가 SNS시대에 유행할 만한, 알맞은 장르인지 말이다. 텍스트보다 영상 매체에 익숙하며, 긴 글보다는 짧은 글과 이미지 그리고 움짤로 소통하고 의견을 내는 SNS 시대에, 과연 시조는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 아니, 문학이 과연 이 시대에 필요하기는 한가. 어익후! 문제가 또 심각해졌다!


SNS와 문학의 공간은 만날 수 없는가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시팔이 하상욱'은 한때 어마무시한 열풍을 몰고 왔다. 그는 'SNS POET'라고 해서 SNS(특히 트위터)에 딱 들어맞는 '단편시'를 쓰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다양한 예능 프로에 섭외 1순위가 되었고, 여전히 '스타강사'로서 여기저기, 이곳저곳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학계에서는 그를 '시인'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문학계에서 하상욱은 '진짜 시인'이 아니며, '진짜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엔터테이너 혹은 셀럽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그런 '괴짜'로 보고 있는 것이 현 문학계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단편시는 현대인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수많은 상품 광고는 그의 단편시 스타일을 따라했다.


   그러나 하상욱의 출현으로 인해 문학계는 또 한 번 숙제를 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진짜 시'는 무엇이며, 시는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상욱의 시가 '진짜'가 아니라면, 진짜 시는 어떠해야 하며,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소위 '진짜 시'가 하상욱의 단편시처럼 대중과 호흡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하상욱은 똑똑하고 특이한 사람! 그는 문학계의 모진 비판의 칼날을 비껴가기 위해 본인은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단지 '詩팔이'로서 시를 팔아먹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그는 자신이 감성팔이를 하고 있다고, 잠깐 공감하고 잊히는 것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문학계는 그를 비판할 수 없었다. 다만 배는 아플 수 있겠다. 이제 그는 스스로 한 장르가 되었다.



하상욱의 프로필을 보라.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다.


   자, 여기서 시조가 하상욱이라는 달리는 말 혹은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고자 다! SNS로 '문학적인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하상욱처럼, 시조 역시 짧은 형식으로 유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SNS 상에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없지만, 시조는 극히 짧은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시조를 SNS에 올리거나, SNS에서 시조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 내가 보기에 시조는 절대로 SNS 상에서 유행하거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SNS는 깊이가 얕다는 것. SNS는 '문학적인 것'이 오가는 공간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문학적인 것을 책에서 찾으려고 하지, 아직 SNS에서 찾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문학은 '진지한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깊이의 문제에 있어 SNS는 얕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말했다. "트위터는 똥 싸는 곳이고, 페이스북은 똥 싸는 것을 자랑하는 곳이고, 인스타그램은 똥 자체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이다. 위험한 발언이긴 하지만, 조금은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 SNS는 비교적 젊은 세대의 공간이라는 것. 2004년 2월 4일 페이스북이 시작되었고, 2006년 7월 15일 트위터가 시작되었다. 이제 20년의 역사도 되지 않은 SNS는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다룰 수 있는 젊은 세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게는 언감생심. 그러나 슬프게도 여전히 시조시인들의 연령대는 (매우) 높다. 즉, 시조 쓰는 사람이 손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SNS인데, SNS 시조라니. 안타깝구나ㅠㅠ

   셋째, SNS는 홍보의 공간이라는 것. SNS로 타인과 소통하고 일상을 공유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글은 홍보에 가깝다. 가식 1도 없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바쁜 곳이 SNS다. 너무 쎄게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이 SNS의 본모습이다. 더욱이 개인의 일상 같지만 이미 유튜브 뒷광고와 비슷하게 자본이 흘러들어간 것이 SNS다. SNS를 더 비판할 수 있겠으나, 여기까지. 홍보의 공간으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SNS가 문학의 공간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좋아요를 구걸하는 곳에서 얼마나 삶에 대한 고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좋아요 구걸을 은근히 비판하는 유병재의 찰진 드립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의 짧은 형식과 시조가 잘 어울린다고 보면서 시조의 가능성을 점친다. 짧은 형식을 선호하는 시대이니, 앞으로도 SNS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애용할 것이니 사람들이 시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SNS와 문학의 공간은 서로 만나기 어렵다. 여전히 우리는 '문학적인 것'을 따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SNS는 생각보다 빠르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SNS라는 매체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섣부른 낙관론에 빠져 있는 것이 현 시조단의 실정이다!


현대라는 새 술, 시조라는 낡은 부대


   이런 말이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성경책에 있는 말이다. 새 술을 오래된 부대에 넣으면 가죽이 터진다는 말이다. 거꾸로 해도 터진다. 오래된 술을 새 부대에 넣어도 터진다. 적당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시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현대를 담으려면 현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조는 낡은 부대니까 말이다.


   즉, 시조는 현대를 담을 수 없다. 시조는 오래된 부대, 현대는 새로운 술. 새로운 현대를 오래된 시조라는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복잡다단해진 현대인의 감정과 삶을 짧은 3행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소위 '미래파'가 등장하면서 시가 무척 길어졌다. 시집 2~3페이지를 넘기는 시는 기본이었고, 시 1편으로 시집 한 권을 낸 시인도 나타났다. 그만큼 현대인은 복잡한 삶을 살고 있으며 매우 복잡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3행의 시조라니. 새 술은 얼마 들어가지도 못하고 낡은 부대가 터지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시조는 형식이 오래된 것이지 내용이 오래된 것이 아니다! 형식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요즘 시대와 걸맞지 않은 고시조스런 내용을 가져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낡은 부대, 고시조다. 그러나 현대인의 감정과 마음, 현대인의 삶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새 부대. 낡은 부대와 새 부대의 차이는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의 차이다! 

   결국 문제 하나가 남는다. 현대인의 마음과 삶을 시조 3행으로 충분히 담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나는 당연히 충분하다고, 아니 자리가 남아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을 미학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당연히 무척 어렵다. 하지만 이 정도 극강의 난이도가 있어야 덤빌만하지 않겠는가. 나는 계속 덤빌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내용이 담기느냐에 따라 시조는 새로운 부대(형식)가 될 수도 있고 낡은 부대(형식)가 될 수 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처럼 한 치의 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몇 마디의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즉, 촌철살인이 가능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시조는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가 될 수 있다. 간단한 문제다!


그릇이 문제가 아니라 그릇에 담긴 내용이 문제다.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시조라는 그릇은 오래되었다. ㅇㅈ(인정). 그러나 그릇에 담기는 내용 또한 오래된 것은 아니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일반인이 오해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시조가 오래된 형식이니 당연히 오래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해버렸다. 하지만 틀렸다. 내용이 형식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 시조가 현대적이냐고? 응. 현대적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보여주마. 최첨단 하이브리드 시조를.

   낡고 오래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당신의 마음, 당신의 글이다. 참신한 형식도 중요하지만, 참신한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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