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편집장 Dec 26. 2020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2

#정형률은 폐쇄적이라 답답하고 갑갑 #현대인의 감정을 담기에 역부족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2
시조의 정형률은 폐쇄적이다!


   교과서 덕분인지 대부분 사람들은 시조의 리듬을 '3장 6구 45자'로 알고 있다. '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4/3'이라는 글자 수가 불문율로 정해져 있어 이 규칙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뜩이 할 말도 많은데 45자로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과 더불어, 현대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어떻게 3장으로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하고 고래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을 노래하기 위해 단시조가 아닌 연시조로 계속 연을 늘리다 보면, 그것이 자유시(현대시)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고 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진퇴양난 혹은 진퇴유곡이로구나.

   1908년 한국 최초의 현대시라 일컫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작품이 출현한 이후, 그동안 심신수양의 도구였던 문학은, '정(情)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개인의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을 자유롭게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 정해진 질서, 정해진 형식 따위 없이, 느낌 가는 대로 drop the beat!!

   그러나 1908년 혹은 개화기 이전의 문학작품은 하나의 질서에 부합해야 했다. 바로 유교! 조선의 주된 사상체계는 유교였으니까. 문학작품을 향유할 수 있었던 조선의 양반들은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보다, 좀 더 고급진 전략을 구사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거나 자연물을 통해, '나 이렇게 성리학적인 사람이야' 하고 자신을 PR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써 내려갔다. '천한 것들'과는 다르니까! 물론 대부분이 다 가식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터.


방자보다 더 욕망에 충실한 이몽룡(+변사또),  어장 관리하는 춘향이. 매우 유교적인 춘향전을 사정없이 비튼 영화 <방자전>이 개봉하자 춘양문화선양회에서는 상영 중지를 요청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21.2세기를 지나 21.3세기를 향하고 있는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시조처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짖는다"하며 '삼강오륜'스러운 것을 시조로 본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런 류의 시조는 현대시조가 아니라, 고(古)시조다. 그러나 현대시조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다 보니, 시조는 삼강오륜스러운 세계관을 가진 문학 장르이며, 개인의 욕망이 적절히 억압되었으니 시조의 정제된(경직된) 정형률과 쿵짝이 잘 맞는다고 우리는 쉽게 오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들끓는 우리 현대인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기에 시조의 정형률은 갑갑하고 답답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가슴이 다 타들어갈 것 같은 이 마음을 어떻게 '깔끔하게' 4마디와 3장으로 나누고 글자 수를 맞춘다는 말인가.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 시켜줬"다는 건모형의 <잘못된 만남>이 1995년에 나왔으니, 25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심박수보다 더 빠른 비트를 원하는데, 시조라니. 물 없이 고구마 10개 먹은 기분이렸다!


"그런 만남이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넌 나보다 내 친구에게 관심을 더 보이며 날 조금씩 멀리하던 그 어느 날~"  



삼강오륜스런 시조는 고시조, 미학을 향하는 시조는 현대시조


   고고한 선비정신이 '여전히' 흐르고 있는지,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숨기고 조선조 양반 같은 작품을 쓰는 시조시인들이 '여전히' 많다. '천한 것들'처럼 쓸데없는 잡소리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정제하고 정제한 3장으로 승부를 보려는, 그래서 단시조가 시조의 정수임을 강조하는 그런 시조시인들이 무척 많다. 단시조 문제는 뒤로 하고, 정제의 문제에 파고들겠다! 물론, 시조든 뭐든 간에 아무 말 대잔치는 예술이 되기 어렵다. 앙드레 브르통으로부터 시작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이 아닌 이상, 예술은 나름의 내적 논리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의 논리와 질서는 도덕이 아니다. 삼강오륜스런 도덕은 더더욱 아니다!


삼강오륜스러운 시조를 만나거든, 반갑다 고시조야, 하고 손 흔들어주길 바란다.


    여기서 또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경계가 나눠진다. 고시조는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고, 현대시조는 욕망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보여준다는 것이다.(조선후기 사설시조 제외) 점잖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나 예술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 추미(醜美)도 존재하는 마당에, 욕망을 억누르는 것은 능사가 아닐 것이다. 물론 무분별한 노출은 그다지 미학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미학이다! 욕망을 노출하든 안 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얼마큼의 미학을 추구했느냐다. 당연히 미학은 시대마다 다르고 공동체마다 다르겠지만, '정제'가 미학을 향해야지 도덕을 향해서는 된다는 것이다. 예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이라고 해서 도덕과 관습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으나, 예술은 미학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용서가 된다.   

   미학의 추구 여부 혹은 미학을 얼마나 확보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시인의 윤리로서 미학은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자, 정제의 문제는 이렇게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겠다. 시조는 정제된 질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형식이지 욕망이 아니다. 아니, 욕망이 정제될 수는 있나? 그것은 가식 아닌가? 시는 시집에서, 도덕은 도덕책에서 찾으시길. 왜 도덕을 시로 쓰려는가.  


정형률이라는 울타리 혹은 예정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강의를 아예 못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매년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시조 특강이나 글쓰기 특강을 했다. 특히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시조 특강을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깜놀'했다. 초딩들이 시조를 너무 잘 썼기 때문이다! 30분 남짓 시조의 형식을 알려주고 시조백일장을 열었는데, 그때마다 나온 초딩들의 작품은 가히 압권이었다! 기발한 것은 둘째 치고, 어쩜 그렇게 형식을 잘 지키면서도 재미있게 잘 쓰는지, 일반 어른들보다 훨씬 나았다! 교육 현장에 있는 선생님들께 종종 들었지만, 아이들이 시조의 정형률을 맞추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자유시를 쓰기 어려워한다고 들었다. 뭔가 시사하는 점이 있다.

    정형률이라는 울타리가 있다. 누군가는 이 울타리 밖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이 울타리 안이 안전하다고 그래서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시조를 오래 쓴 사람일수록, 내공이 깊은 사람일수록 이 울타리 안을 편하게 느낀다. 그러나 초심자들이나 일반인들은 이 울타리를 갑갑해한다.

   이 차이. 이 차이가 시조시인과 일반인, 하수와 고수를 가른다. 울타리의 다른 버전은 예정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처럼, 닫힌 영역이 있다. 예정설의 반대항은 자유의지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예정설 안에 있다(예정조화설)! 정형률도 마찬가지. 갑갑하고 답답한 같지만, 안에서 충분히 뛰어놀 있고 모든있다!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글자 수 맞추는 것에 쩔쩔매는 하수의 단계를 지나면, 글자 수를 가지고 노는 고수의 단계에 이른다. 한 단어로 한 세계를 가져오기도 하고, 한 문장으로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보여주기도 하니, '폐쇄적'이라는 말은 넣어둬, 넣어둬.

    여기, 시라는 구조물이 있다. 상자를 쌓아 올려서 의미의 최상층까지 다다라야 한다고 치자.


왼쪽과 오른쪽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아 보이는가? 어느 쪽이 더 쉬워 보이는가? 당신이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왼쪽과 오른쪽의 나무 토막 쌓는 방식이 다르다. 왼쪽은 무질서하게 마구마구 쌓아 올리려고 했고, 오른쪽은 질서 있게 쌓아 올리려고 했다. 어떤 쪽이 더 효과적이고 더 빠를까.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공들여 쌓아 올린 정형률이 있고, 대충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자유율이 있다. 어떤 것이 더 좋아 보이는가? 물론 자유율 역시 차곡차곡 의미를 적층해낼 수 있고 심화될 수 있다. 그러나 단어가 많아질수록, 문장이 많아질수록 뒤죽박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정형률은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답답한 규칙이 아니라 안정적인 질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두 번째, 시조의 정형률은 폐쇄적이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정형률은 갇힌 것이 아니라 갖춘 것이다! (뿌뿌뿌뿌뿌~라임 쩐다) 다만, 형식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그 안의 감정 역시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불안정하며 질풍노도를 겪고 있으니까. 자, 이제 '강려크한' 문제는 이것이다. 안정적인 형식에 어떻게 불안정적인 감정을 담을 것이냐!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것처럼 말이다.


냉장고라는 시조에 코끼리라는 현대인의 감정을 넣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문을 닫는다. 끝.



   정형률이 폐쇄적이라는 말. 그래서 답답하지 않냐는 말. 늘 들어왔다. 그런데 난, 한 번도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믿어줄까? 나는 무엇이든 3행으로 말 못 한다면 장편소설 한 편의 분량이 되어도 말 못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3행으로 얼마든지 무엇이든 썰 수 있다는 말이다. 잘 벼린 칼처럼 말이다. 내 칼날이 무디지 않도록 늘 갈고 닦아야겠다.

   정형률이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정형률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폐쇄적인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이전 08화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