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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Dec 11. 2020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1

#시조는 한국 전통 시가 #시조는 민족정신 그 자체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1
시조는 민족 전통 시가이니 지켜야 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시조의 사전적 정의는 "고려 말기부터 발달하여 온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것이다. 시조 역시 판소리나 씨름처럼 한국 고유의 '민족적인 것'이니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과 함께. 우리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을 때'(후뢰시맨)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시조는 고려말 정몽주&이방원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얼마나 뿌리 깊은 예술 장르인가! 심지어 신라 10구체 향가의 3단 구성 혹은 낙구로부터 시조의 유래를 찾기도 하니, 아아, 이 얼마나 뿌리 깊은 민족 장르인가!! 현재 몇몇 시조 관련 학계와 단체에서는 시조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 최근에는 씨름과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하여가와 단심가는 지금으로 따지면 랩 배틀이다. 이방원이 먼저 디스 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중)


   더욱이 시조를 쓰는 시인들도 은연중에 본인의 작품 활동이 '민족의 얼(정신)'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랫동안 시조단에 속해 있으면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내가 늘 듣는 건배사가 있다. '시조를 위하여' 혹은 '시조의 세계화를 위하여'. 한국 전통 문학 장르이자 민족정신이 깃든 시조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이자 민족정신 그 자체인 것이다. 시조 1편도 교과서에서 찾기 힘드니 교과서 필진의 잘못을 운운하거나, 수능에 기껏해야 고시조 1편 정도 지문으로 나오는 대한민국의 백년지교육대계를 걱정하는 우리 시조인들. 나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여기서, '묻고 떠블로 가!'. 최근 BTS가 국위선양을 하고 K-좀비가 전 세계인을 홀리며 소위 '한류(K문화)'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시조 역시 한류에 편승하고자 한다. 시조와 단골로 비교되는 일본의 하이쿠처럼, 시조 역시 전 국민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콘텐츠로 만들자는 것이다. BTS가 시조집을 읽고 SNS에 올릴 날을, BTS 노래에 시조가 나오는 그런 꿈같은 꿈을 꾸는 것이다. (이왕이면 제 시조집을 읽고 올려주세요!!)

   시조에 대한 인식이 이러다 보니, 시조를 얕잡아 보거나 조금이라도 비판이 가해질 요량이면, 큰일 납니다!! 감히 민족 장르를, 민족정신 그 자체를 비판해? 자네, 지금 자네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인가? 제정신인가? 눈치 챙겨!

   실제로 학계나 문단에서도 이런 기류가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시조의 정형률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보고 자유시를 '근대적인 것'으로 보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시조 스스로 시조의 미학과 리듬을 밝히고 연구하는 일에는 게을렀다. 전통 장르인데 뭐! 전통 장르니까 할많하않!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자들인가! 시조가 별로라도 입 밖으로 쉽게 '별로네'라고 말하기 어렵다.


(파리의 연인ver.) "너 바보야? 시조가 별로라고 왜 말을 못 해! 이게 뭐냐고 왜 말을 못 하냐고!" "어떻게 그래요! 내가 어떻게 그래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말고) 시조는 민족 전통 시가다. 그러니 계승하고 지켜야 한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시조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전통과 민족이라는 실드(shield) 때문에 시조 외부는커녕 시조 스스로 비판능력을 키우지 못했고, 온실 속 화초처럼 웃자라기만 했다. 여전히 시조단에서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는 혁신하자'(1932)는 구호를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있다. 시조단의 체 게바라 가람 선생! 학계의 현대시조 관련 논문이 절반 아니, 90% 이상이 가람 선생과 관련된 논문이며, 지금도 시조의 현대성, 시조의 미래와 관련하여 가람 선생이 소환된다. 지금이 2020년이니 90여 년이 지났다. 다시 말해 90여 년동안 시조는 단 한 번도 혁신이 없었던 것이다. 시조라는 고인물, 어떡하지 너.



전통과 민족이라는 실드


   감히 가람 선생(님)을 망령되게 입밖에 꺼내다니. 저 지금 목숨 걸고 씁니다 여러분. 진짜예요. 그러나 계속 이렇게 전통과 민족이라는 실드가 시조를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가. 전통을 계속 지키려면 박물관에 넣으면 되고, 민족을 지키려면 북한처럼 고립되면 된다. 다문화가정과 국제결혼을 쉽게 볼 수 있는 21.2세기 한국에서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라 일컬어지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물론, 민족 고유의 것을 무시할 의도도 없고, 손절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전통이랍시고 모든 문제를 덮어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킬 것이면 제대로 지키자는 말이다. 박제시키지도 말고, 어설프게 변용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여기가 내가 계속 고민하는 부분인데, 깜빡이 없이 바로 치고 들어가겠다!

   시조는 전통 문학 장르가 아니다! 시조는 고려말부터 시작된 고인물이 아니라, 1930년대 식민지 때 발견되고, 발명된 새로운 발명품이다. 이 글에 앞선 매거진 글에서 말했듯이, 시조는 부르는 시조에서 읽는 시조, 쓰는 시조로 전환되었고, 음악이 아니라 문학이 되었다. 고려말부터 시작된 고인물은 노래, 지금 우리가 읽고 쓰는 것은 문학! 왜 시조는 뭐가 부족해서 자꾸 음악 장르였던 고시조를 소환해오는가. 정통성과 역사성을 확보하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는가? 왜 자꾸 '빽'을 만드려고 하는가.


(범죄와의 전쟁ver.) 내가 임마 너거 조상이랑 임마 어저께도 어 같이 밥묵고 어 싸우나도 같이 가고 어. 이  새... 다 했어!! 


    다른 예술 장르와 당당히 미학으로, 문학성으로, 대중성으로 '다이다이'(たいたい) 뜨면 될 것을. 왜 시조는 비겁하게 전통과 민족을 끌고 오는가. 특히, 시조는 걸핏하면 자유시를 걸고넘어지며 자유시와 싸우려고 한다. 왜 그럴까. 식민지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다.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의 낭만주의 시 영향으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자유시가 생겨났던 그때나, 소위 '미래파'라 불리던 시인들의 출현으로 최근의 난해한 시가 생겨난 지금이나 데칼코마니처럼 상황이 똑같다. 

   최근 시조단에서는 방만해진 자유시, 난해한 자유시의 대안으로 시조를 내세운다. 독자와 소통이 불가하고 무절제하게 늘어난 시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처방전으로 (겁나 짧은) 시조를 내세우는 것이다. 심심치 않게 여기저기 문학잡지에서 그런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SNS로 소통하며 긴 글에 익숙지 않은 이 시대, 이 세대에 알맞은 길이를 자랑하는 미니멀리즘 시조야말로 대세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나도 시조가 대세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지금처럼 고인물로 시조가 존재한다면, 대세는 개뿔. 조만간 시조는 박물관 한 구석탱이에 고이 자리 잡은 유물이 될 것이다.


이러다간,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처럼 밤만 되면 시조가 깨어날지도 모른다.



전통과 민족이라는 호랑이에서, 그만 내립시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전통을 지킨답시고 작품성 떨어지는 시조는 말 그대로 광탈(광속-탈락). 시조라서 용서해 줄 것이라 생각 마라. 전통이고 나발이고, 문학 장르면 언어 미학과 예술성으로 승부를 봐야지. 자유시든 소설이든 뭐든 간에 다 덤벼. 난 오늘만 살아. 뭐 이런 결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부터 반성해야겠다.

   1권 분량의 장편소설 혹은 시집 2~3페이지에 이르는 자유시 한 편이 있고, 3행의 짧은 시조 1편이 있다. 누가 이길까. 잘 쓴 사람이 이긴다. 보다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 이긴다는 말이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복싱이랑 우슈가 싸우면 누가 이기지?" "당연히 총 든 놈이 이기겠죠. 빵." (영화 바르게 살자 중)


   물론 작품성의 우위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위 '작품성이 있다'는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기준이나 정답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1편을 두고 100명의 독자가 100가지의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면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겠으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다! 누가 읽든, 많이 읽든 간에 독자는 뒤로 하고, 작가는 목숨 걸고 작품을 써야 한다. 목숨까지 걸 생각이 없다면, 적당히 쓰시라. 적당한 작품이 될 것이다. 적어도, 대충 써놓고서 전통과 민족 장르의 시조를 지켜냈다고 자위하지는 맙시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시조 시인'이라고 하여 전통 장르, 민족 장르인 시조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본인 작품이 문학사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문학 혹은 예술에 손톱만치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자문하시길. 시조 시인들이 지켜야 할 것은 시조가 아니라 문학이고, 민족정신이 아니라 시인정신이다. 전자를 내세울수록 우스워지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시조를 쓰는 시인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도, 앞으로도 시조는 '민족적인 것'임을 내세우는 시조인들이 많을 것이나, 미안하게도 시조라는 장르는 그런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너무 거칠게 말했나. 강약 조절 실패. 시조시인들이 이 글을 보고, 나를 욕할 수도 있겠다. 아니, 욕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겠다.)

   시조를 쓰고 연구하는 역시 깊이 반성해야겠다. 전통과 민족이라는 호랑이 등에만 올라타지 않았는지, 역시 호랑이 위세를 빌린 여우(호가호위)가 아니었는지 다시 돌아봐야겠다. 우리 이제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자. 호랑이 탈을 벗자. 


호랑이를 등 뒤에 두다간 조만간 잡아먹힐 것이다. 호랑이가 떠난 순간 다른 동물들에게 개무시 당할 것이다. 정신 차리자.


   따라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조는 한국 전통 시가, 민족정신 그 자체가 아니다. 시조 역시 한 시대를 관통해가는, 한 시대에 유행하는 예술이자 문학 장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쓴 작품은 살아남는다. 그 살아남은 작품들은 전통이 될 것이고 문학사(史)가 될 것이다. 

   전통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때문에 전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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