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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Nov 23. 2020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0

#시조는 3장 6구 45자 #시조는 외형률, 자유시는 내재율

당신이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을 하나씩 보여주겠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시조의 모든 것.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시조의 모든 것. 그동안 정몽주&이방원의 '단심가+하여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던, 시조의 최첨단을 보여주겠다!


   바로 직진하겠다. 2008년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하여 10여 년 동안 시조를 써오고, '정형률'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나에게 (언젠가 반드시 해야할) 밀린 숙제가 하나 있다. 바로 기존의 시조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무참히 깨뜨리는 것. 그래서 시조 쓰는 시인들을 한 방 먹이는 것!!

   "당신들은 조선시대 시조를 쓰고 있죠. 당신들이 쓴 것은 현대시조가 아니라 고시조랍니다."하고 말이다. 그러나 지엄한 위계가 존재하는 문단에서 쌀밥으로 보나 짬밥으로 보나 어린 내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에라 모르겠다. 브런치를 시조시인이 얼마나 본다고! 일단 브런치를 연재해가면서 논리를 이어가려 한다. 지금 (활활 불타는) 각오로는, 브런치 글이 가래떡 뽑듯 쭉쭉 잘 나온다면, 내년 초에 바로 책 한 권 낼 것이다! 시조단에 돌을 던지겠다! 브런치 최초로, 시조에 관한 글을 써가겠으니, 어여삐 봐주시길.



고시조는 노래, 현대시조는 글


   가장 먼저, '일반인'이 잘 모르는(굳이 알 필요 없는)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구분해드리겠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정몽주&이방원의 시조는 당연히 '고(古)시조'! 그러나 시조시인들이 지금 쓰고 있는 시조는 '현대시조'다. 어떻게 구분하냐고? 학계(+문단)에서는 1906년 7월 21일 ‘사동우대구여사’라는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고 있다. 이때를 기점으로 '현대'라는 말을 시조에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는 학계에서 사후적으로 (기념할) 기점을 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혈죽가> 전에 최남선이 시조를 썼다는 기록도 있고(원고는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체에 시조가 발표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협실의 소슨 대는 츙졍공 혈젹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즁의 풀은 뜻은
지금의 위국츙심을 진각셰계

츙졍공 구든 졀개 피을 매자 대가 도여
누샹의 홀노 소사 만민을 경동키는
인생이 비여 잡쵸키로 독야쳥쳥

츙졍공 고든 절개 포은 선셩 우희로다
셕교에 소슨 대도 션쥭이라 유젼커든
허물며 방즁에 난 대야 일너 무삼
― 사동우대구여사(寺洞寓大丘女史), 「혈죽가(血竹歌)」(<대한매일신보>, 1906. 7. 21)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황실의 외척이었던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자결하고, 그곳에 녹죽이 자생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소위 '혈죽 모티프' 시가가 유행처럼 창작되었다. 각 신문사는 당시에 유행했던 개화기시조나 개화기가사 형식으로 다양한 '혈죽가'를 발표하면서 대중의 각성을 유도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시조와 가사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게 된다. 언론매체에서는 한시 열풍이 불었고, 최초의 근대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가 발표된 이후 김억의 <태서문예신보> 등을 통해 서구의 낭만주의와 자유시가 유입되어 신시(新詩)가 등장하면서 시조와 가사는 역사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민영환과 일본인 사진사 기쿠다가 찍은 혈죽 사진. 정몽주의 선죽교와 쌍벽을 이룬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 서구에서 수입된 신시와 계급문학파(KAPF)와 대립하던 보다 보수적인 문필가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국민문학파. 이들은 조선인의 언어와 성정에 알맞은 민족문학 형식을 찾다가 민요와 시조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른바, 민요시운동과 시조부흥운동의 발발.

   1927년 3월 잡지 <신민(新民)>에 설문 좌담이 특별 기획되었다. 당대의 문필가들은 장르 구분 없이 설문에 자유롭게 참여하였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설문의 제목이 바로 ‘시조는 부흥할 것이냐’였다. 12명의 문필가들에게 과연 시조가 부흥할 수 있는지, 또는 부흥해야 한다면 왜 부흥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였는데, 이들의 견해는 제각각이었다. 이중 최남선은 ‘부흥 당연, 당연 부흥’의 제목을 단 글에서 시조는 우리 민족 유일의 것이자, 시조 부흥의 사명을 ‘반드시’ 이뤄야 함을 피력한다. 이른바 ‘시조부흥운동’이 촉발된 것이다. 이병기, 이은상을 비롯한 여러 시조부흥론자들이 등장하였고, 특히 이병기는 시조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시조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대에 유행하는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발견하여, 시조가 조선 후기에 발생한 곡조의 이름이었음을 밝힌다. (절가의 줄임말이 시조다)

  여기서 고시조와 다른 현대시조가 발명된다!! 고시조는 노래, 즉 음악 장르였으니, 새로운 근대 조선의 민족 시형을 찾는 이들에게 고시조의 전통을 그대로 받되, 보다 현대적인 '문학 장르'로서의 시조가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고시조를 '부르는 시조(唱)'에 한정시키고, 현대시조를 '짓는 시조(作)', '읽는 시조'로 격상시킨다.


(몇 번 뵌 적이 있는) 시조창하는 가객 문현(국립국악원). 목소리가 예술이십니다! 시조는 원래 노래였다. 고시조는 음악, 현대시조는 문학입니다요.


    문학 장르로서의 현대시조는 1920년대 후반에 '발명'되고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음악-고시조에서 결별을 선언하고 새롭게 태어난 문학-현대시조를 구분할 수 있다.  



이놈의 '3장 6구 45자'


   시조부흥론자들은 가창과 낭독의 차이를 생성하면서, 음악성을 제거한 고시조가 현대시조의 형식을 제시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고시조(시조창)에서 악곡을 제외했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음수율’뿐이었는데, 이를 근대적 또는 과학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서둘러' 시조의 리듬(율)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3장 6구 45자'라는 규칙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이광수는 시조 형식의 기본을 12구(句)로 보면서 기본형을 초장 3/4/4/4 15음, 중장 3/4/4/4 15음, 종장 3/5/4/3 15음 전체 45음으로 규정하되, 음수에만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변칙과 다른 방식의 시조 리듬이 발생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 이광수의 기본형을 '복-붙'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윤제!

   1931년 조윤제는 최남선이 소장하고 있었던 시조 집 <가곡원류>(1876)를 가지고 고시조 중 단시조 2,759수를 3장 12구로 나누는 전제하에 각 구의 음절수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초중장을 3/4/4(3)/4, 종장을 3/5/4/3으로 보고, 초중장 제4구와 종장 제3구를 4음으로, 종장 첫구를 3음으로 고정시켰다. 이는 이광수가 제시한 기본형과 다를 바 없는데, 단지 시조 노래집 <가곡원류>라는 텍스트를 대상으로 통계 냈다는 것에 보다 신뢰성을 획득했을 뿐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실제 고시조를 분석했을 때, 초장이 그 기준에 일치하는 작품은 47%(1,298수), 중장은 40.6%(1,121수), 종장은 21.1%(789수)에 불과했다. 더욱이 작품 전체가 자수율 기준에 일치하는 경우는 4%에 불과해, 결과적으로 조윤제는 고시조의 신축적인 형식을 축소하고 제약한 기본형을 제시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시대 조선어문학을 전공한 유일무이한 경성제국대학 문학 전공자였다! 당연히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터. 자연스럽게 이광수의 기본형을 복-붙하여 자신의 이론으로 삼았고, 그것은 고스란히 초창기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우리는 시조의 형식을 조윤제가 제시한 '3장 6구 45자'로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내재율과 외형률(외재율)이라는 교과서적 용어가 뙇!



90년 전 고시조 분석으로 만들어진 '부정확한 통계값 3장 6구 45자'로 시조를 규정하는 일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



   시조가 무엇인지 물으신다면, "시조는 3장 6구 45자의 외형률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조 개념 정의다. 과연 그럴까. 음수 문제는 뒤로 하고 '내재율&외형률'부터 부셔주마!



내재율, 외형률이라는 수상한 말

   시조부흥론자들이 고시조(시조창)에서 시조의 기본형을 도출하고 한국 시 리듬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음수율을 전개했듯이, 새로운 리듬론이 자유시 쪽에도 요구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자유시 담론을 주도했던 이들은 먼저 자유시의 ‘시적 리듬’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했고,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내재율'이다!

   근대 초기 자유시의 리듬은 ‘내재율(內在律)’, ‘내용률(內容律)’, ‘내심률(內心律)’, 내율(心律)’ 등 논자마다 다양하게 명명되었는데, 여기서 ‘내(內)’라는 개념이 이 어휘들을 포괄하는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시인의 내면과 마음 안의 정서를 반영하는 리듬을 ‘내재율’로 명명하였다. 쉽게 말해 아사무사(알듯 모를 듯)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그런 감정을 시로 느끼는 것이 바로 '내재율'이다.


그 유명한 전광렬 눈물 짤. 시는 마음을 뒤흔들어놔야 제 맛!


   자, 여기서 문제. 그렇다면 외형률(외재율)은? 외형률은 마음 안쪽이 아닌 바깥에서 오가는 것인가? 외형률은 시를 보자마자 바로 리듬을 느끼는 것이고, 내재율은 바로 드러나지 않고 읽고 음미해야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시조는 감상할 필요도 없이 보는 순간 바로 리듬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

 

문제집(+교과서)에 나오는 운율의 정의다. 다들 기억날 것이다.


    외형률은 시의 표현에 규칙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내재율은 시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모든 시조시인의 작품에는 개성적, 주관적 운율이 없는 것인가?(발끈+빠지직) 그러나 내재율의 정의를 오래 노려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내재율은 어떻게 리듬(운율)이 발생하고 느껴지는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규칙 따위 필요없이, 그냥 느껴지는(feelling) 거야,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으니 그것에서 뭔가가 느껴진다는 것이고, 시조는 정해진 형식이 있으니 바로 뭔가가 느껴진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 뭔가는 도대체 뭔가.


"조금 전 어떤 필링을 느꼈습니까. 그 필링. 그것을 가지고 시로 표현해보세요".(<넘버 3>의 랭보)
한국 영화사에 있어 시인은 이렇게 멋지게 등장하였다 : <넘버3> https://youtu.be/MfAYbdd_GaQ


    왜 이런 '내재율'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사정은 간단하다. 시조가 가진 정형률에서 벗어나는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정형률이 아닌 것, 정형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OK!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갖게 된 것을 '근대적(현대적)'으로 보고, 규칙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을 '전근대적'(근대에 미달한 것)으로 보았다. 식민지 지식인 눈앞에 나타난 서구의 첨단문물에 걸맞은 새로운 조선 시형이 필요한데, 고려말부터 이어졌다는 시조가 웬 말인가.

   식민지 이후,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근대성 논의가 학계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 역사의 발전처럼 문학도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시조→자유시'를 문학 발전의 과정으로 보았다. 외형률은 옛날의 고전적인 것, 내재율은 최근의 세련된 것. 이렇게 도식화하면 많은 것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식민지근대화론도 극복하기도 쉬워진다!!

    그렇다면, 시조는 역사 속 전통이자 유물인데, 계속 보존하고 계승해야 하는 것인가. 시조를 쓰는 사람은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이자, 애국자인가. 마치 택견이나 씨름, 사물놀이나 판소리 같은 한국 고유의 것이 어렵사리 계승되는 것(해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조를 신석기 돌도끼처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시조시인들은 가만히 있는가. 나는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가 가진 시조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조는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것이며, 3장 6구 45자라는 형식으로 인해 시의 리듬을 아주 쉽게,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 더욱이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감정을 짧은 시형식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시조는 시(자유시)보다 열등한 것으로 본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시조의 모든 것을 하나씩, 천천히 보여드리겠다. 기대하시라.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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