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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Feb 09. 2021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7

#시조는 3행으로만 써야지 #행갈이를 하면 시조가 아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7
시조는 3행이어야 한다!


 

   이번 글부터는 심화 과정이니 긴장하시길. 일반인이 쉽게 하는 오해로부터 시작해 시조단, 시조시인, 한국문학 연구 장에 이르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서 이제 시조라는 장르 존재론에 가닿게 되었다. 글이 다음 글을, 문장이 다음 문장을 안내해 주었다. 고마울 뿐이다. 신기하다. 아이디어 스케치 차원으로 써 내려갔지만, 곧 책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올해 상반기에 책으로 묶을 것이다!!)

   각설하고, 작년 8월이었다. 어떤 시조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원고청탁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3장의 형식 파괴, 무분별한 배행 등으로 인한 시조의 정형성이 훼손된 작품은 싣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늘 그래 왔듯이 작품에 알맞다고 생각되는 행갈이와 연갈이를 해서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내 작품은 정형성이 파괴되어 시조가 아니니, 작품을 3행으로 고쳐달라고 했다. 시조가 자유시처럼 보인다고, 자유시처럼 보이면 자유시를 따라간다고 여기게 되고, 정형률을 지키지 않으면 시조가 아니라고 말이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며칠 고민 끝에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진짜 이런 성격이 아닌데, 정말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싸움닭'이 되었다. 

   다음은 토씨 하나 고치지 않은, 그때 보낸 메일의 원문이다.

고심 끝에 다른 작품을 보내드립니다. 뒤늦게 원고 보내면서, 번거롭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먼저. 시조 3행 배열이 '정형률'의 모범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3행 배열은 근대 초기 신문지의 세로쓰기로 인해 부득불 지켜진 원칙입니다. 1920년대 말 가로쓰기로 보편화되면서 3행 배열이라는 형식만 남았고, 이병기, 이호우, 이영도를 비롯한 여러 시조시인들은 3장 배열이 아닌 자유로운 배행을 즐겼습니다.
3행 배열이 아닌 것이 과연 시조 3장을 파괴하고 정형성을 훼손하는 것인지, 다시 따져볼 문제인 듯합니다.
또한, 번역을 위한 원칙이라면 더더욱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시조 번역 사업에 몇 번 참여했었는데, 일정한 길이의 3행으로 번역할 수도 없으며, 번역된 작품은 시조의 3장과 전혀 상관없는 시각률을 보입니다.
시조의 세계화라는 취지는 잘 알겠으나 3장 배열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시적으로 3행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시조인지 알겠습니다만, 그렇다면 3행으로 쓴 자유시도 시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략...)

   목숨 걸었다! 청탁을 주신 잡지사의 주간은 시조단의 매우 높으신 분이었다! 이 꽉 깨물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쫄지 말고 당당하자고, 몇 번이나 문장을 다듬으며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전송했다. 하지만, 메일에 대한 답변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물론, 대충 분위기 파악은 되었다. 이제 나는 영영 그 잡지사로부터 청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논의 역시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회피해 왔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팩폭하겠다. 여러 시조 단체, 시조 잡지사에서 시인들의 작품을 받아 책을 엮는데, 시조가 길어질수록 책 페이지가 늘어나고, 페이지가 늘어나면 제작비가 올라간다. 더욱이 여러 시조 단체에서 작품들을 모아 엔솔로지를 엮고, 그냥 책만 내면 좀 없어 보이니까 영어 번역을 한다. '시조의 세계화'라는 근사한 명목으로 말이다. 근데, 번역된 책이 외국으로 나가긴 하나? 하지만 책 판형이 어떻든 간에 최대한 페이지를 절약해야 하니 '미니멀한 시조'를 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팩트!!

   페이지를 줄이기 위해 3행으로 제한한다는 말을 먼저 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더이상 문제 제기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에 '정형성' 문제가 붙는다. '3장의 형식 파괴와 무분별한 배행'이 정형성을 해친다, 시조가 아니다 하면서 겁을 준다. 과연 그럴까. 정형성은 무엇이고, 3장은 무엇인가. 무분별한 배행과 알맞은 배행은 무엇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끝판왕' 질문이 남는다. 과연 정형성의 기준은 무엇인가(누가 정했는가)?


시조의 정형성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하면 지킨 것이고,  어디를 넘어가면 어긴 것인가. 이 금기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무한 순환하는 우로보스와 같은 문제다.


   시조라는 장르의 성립 요건부터 간단히 따져 보자.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 3장으로 나눠져 있고, 각 장(章)은 2개의 구(句)로 나눠진다. 한 장은 4개의 마디로 나눠지고, 초중장과 다르게 종장은 마디의 변화가 있다. 예컨대, 초중장이 '소음보-평음보-소음보-평음보'라고 한다면, 종장은 '소음보-장음보-평음보-소음보'라는 변화를 줘야 한다. 종장은 클라이맥스 혹은 기승전결의 '결'에 해당되므로 '반전'이 꼭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시조 정형성의 기준 또는 기본이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이것. '각 장을 꼭 1행으로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시조 각 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현대시조가 발명되고 발견된 1920~30년대 작품이 발표되었던 매체를 추적해보면 된다. 당시에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동인지나 신문에 발표되었고, 작품은 다시 시집으로 묶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조선)의 글쓰기 방식은 바로, '세로쓰기'였다.

   세로쓰기는 종서(縱書) 혹은 우종서라 하는데, 종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한자 문화권, 즉 아시아에서는 전부 세로쓰기를 했는데, 이는 두루마리에 글을 쓸 때 왼손으로 두루마리를 펴 나가면서 오른손으로 붓을 잡고 쓰면서 생긴 관행이란 '썰(ssul)'이 있다. 그리고 이런 한자 문화권의 전통에 따라 삼국시대-고려-조선-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세로쓰기 관행을 유지해왔다.  

   따라서 시조 역시 세로쓰기 관행에 따라 세로로 쓰였다. 판형이 큰 동인지나 시집의 경우 한 장은 1행으로 처리되었다. 2행 이상으로 보이면 초중종장을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문의 경우, 작게 할당된 지면에 시조를 쓰다 보니, 각 장이 시작할 때는 들여쓰기(공백)하여 장의 새로운 시작임을 표시하였다.


1927년 10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수록된 가람 이병기의 글과 작품. 작은 지면에 작품을 넣다 보니, 부득이하게 장을 2행으로 나눴다.
1947년 가람시조집 초판본에 수록된 시조 작품. 세로쓰기로 각 장을 1행으로 처리하였다. 세로쓰기니, 한 장을 2행 이상으로 나누기도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각 장이 1행이었던 이유는, 세로쓰기의 관습에 의한 것이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에는 인쇄물이 귀했으므로, 당연히 페이지 절약은 기본이고! 장을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가 없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한글전용 정책에 의해 한글 세벌식 타자기가 일반화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로쓰기'가 확산되었다. 물론, 타자기와 상관이 별로 없는 출판업계에서는 1970년대까지 세로쓰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르러서 신문을 제외한 출판물은 가로쓰기가 대세가 되었고, 신문업계 역시 가로쓰기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60~70년대 전까지 나온 시집이나 소설집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곤욕이었다... 눈이 가자미처럼 몰리는 피로가 있었다ㅠㅠ

    그렇게 가로쓰기가 일반화되면서 시조의 각 장은 드디어 분행이 가능해졌다! 보다 자유로운 시조를 쓰고 싶었던 시인들은 자신의 개성에 맞게, 자신의 작품에 맞는 행갈이와 연갈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초중종장을 3행으로 나열하면, 장과 장 사이의 여백도 없고, 의미론적이나 시각적으로 분절이 필요한 곳이 있기 때문에, 행갈이와 연갈이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행과 연을 나눌 때는, 구를 경계로 나누거나 4마디 중 일정한 부분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 이영도, <아지랑이>(1966)

   춘삼월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행과 연을 나눴다. 당시에는 파격이었으리라. 이 작품을 만약 3행으로 나열했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이와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모든 시는 그 시에 알맞은 행갈이와 연갈이가 있다. 누군가 말했지. 시인은 행갈이와 연갈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나눈 행과 연은 없다! 


시조의 번역 불가능성


   자 그럼, 번역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3행으로 된 작품만 번역이 가능하다? 어째서 그럴까. 간단하다. 분행이 될수록 시조로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 문제도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약 3행으로 된 시가 있다고 치자.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시조와 어떻게 다른가? 다시 말해, 영어로 번역하면 영어 번역에 시조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있느냐 말이다. 

이병기, <난초蘭草 1(Orchid 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Holding a book in one hand, suddenly was I awakened from a doze.
As the streaming sunshine slants aside, and the cool wind rises,
Two to three orchid buds are ready to burst.

박재삼, <동학사 일야東學寺 一夜(A Night at Donghaksa Temple)>

눈 녹은 물과 봄밤을
나란히 묻어버리면

저승 어디선가
낙숫물이 뚝뚝 지고

그대의 먼 입술가에
지금 천지天地가 무너진다.

The water from melted snow and a spring night,
If I bury side-by-side,

Somewhere in the other world they would make
Raindrops, falling from the eaves; "tap, tap."

Upon your lips far away
Now the heaven and earth collapse.

   이는 영어 번역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 안타깝게도 '초중종장 4마디 3장 6구'라는 시조의 정형성은 한국어로만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최근 미국에서 미주시조연구회(Sijo Society of America)라는 동호회와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연구소(Korea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세종문화회(Sejong Cultural Society of Chicago) 등에 의해 이른바 '영어 시조(English Sijo)'가 창작되고 전파되기 시작했다. 여러 동호회와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에서 영어로 쓰는 시조가 소개되고 현재까지도 동호인이 계속 늘어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들이 '영어 시조'를 창작하기 위해 시조의 형식을 45음절(syllable)의 3행시로 보고, 각 행(line)은 14~15음절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음절'은 한국어의 '음수'와 다른 영어의 음절이며, 조윤제의 통계값(3장 6구 45자)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영어 시조' 역시 인쇄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어로 지어진 시조 한 장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3행시' 형식으로 책에 수록하려면 글자의 크기를 대폭 줄여야 한 페이지에 한 작품을 수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1장(행)을 반씩 분리하여 보기 좋게 한 페이지 폭에 맞췄다. 

 David R. McCann,  <Like a martini: three lines with a twist>

 All through lunch, from my table
   I keep an eye on your disputes,
Green lobsters in the bubbling
   tank by the restaurant door.
Slights, fights, bites- Whatever the cause,
   make peace and flee, escape with me!

   최대한 한 장을 15음절로 맞추고 있지만 이 규칙은 가변적이며, 다만 한 장을 나타내기 위해 행갈이 된 두 번째 행은 들여쓰기를 해서 하나의 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 시조가 아닌 3행시가 비슷하게 번역된다면, 그것이 시조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아 물론 가능은 하다. 작가가 시조시인인지 약력을 보면 된다 ㅋㅋㅋ


하버드대 한국학교수인 맥캔은 미국에서 시조 전도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마운 분이시다. (영어를 못해 만나서 말도 못 건넸다;;;;;)


   결국 번역을 위해 시조 3행을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다만 하나의 책에서 모든 작품이 3행으로 되어 있고 영어 번역도 다 3행이라면, 그것을 보는 사람은, '아 뭔가, 규칙이 있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조의 정형성을 보여줄 수 없다. 다시 말해, 시조는 언터처블(untouchable), 번역 불가능한 장르다! 'K-시조'라고 해서 한류 문화 콘텐츠로 시조도 거론되고 있긴 하지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무작정 덮어두고 '시조의 세계화'를 운운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3행은 정형성이 아니다


   시조의 3행 유지를 고수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점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시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이다. 시는 다른 문학 장르와 다르게 행갈이와 연갈이가 있다. 다시 말해 행연의 분절이 시라는 장르가 가진 가장 고유하고 특수한 속성인데, 이 속성은 그저 시와 산문을 나누는 표기법에만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연의 분절이 바로 시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 6쪽)

   그렇다. 분절된 문장 사이의 부족함과 의미의 공백을 독자의 공간으로 남겨두면서 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끝까지 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데, 다 형용하기 어려워 리듬으로 보여주고 그 리듬도 부족하여 공백을 남겨둔다. 그 공백이 바로 시! 시의 형식과 내용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형식이 곧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이다. 

   시조 역시 마찬가지. 시조의 장은 말할 것도 없고, 행갈이와 연갈이를 통해 리듬을 보여줘야 한다. 무분별한 행과 연의 분절이 시조의 정형성을 무너뜨린다고? 3행이 정형성인가? 4마디를 한 행에 보여줘야 정형성인가? 물론 시조시인들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작품에 알맞은 행과 연을 분절하면서 초,중장과 전혀 다른 종장의 반전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이 반전은 단순히 글자 수의 변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중-종장이 비슷한 내용, 같은 '톤 앤 매너(tone & manner)'를 보이고 있다면, 시조가 아니다!! 종장은 초장과 중장과 다르게 반전이 있어야 하고 충격과 공포가 있어야 한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묘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조의 정형성이다. 정형성은 형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3행은 정형성이 아니다!

   시조는 모든 것을 있어야 한다. 모든 변형과 모든 시도가 가능한데, 4마디 초-중-종장의 미학으로 되돌아야 하는 것이 관건. 얼마나 멀리 가서 되돌아올 있느냐에 시조의 성패가 달려 있다. 행갈이와 연갈이가 바로 그것이다. 행갈이와 연갈이로 만들어진 리듬을 저 멀리 보내서 종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이고 가슴 벅찬 일인가.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다!  


시조와 땅따먹기는 같은 원리다. 3번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야 땅을 먹을 수 있듯, 시조 역시 초-중-종장 3번으로 끝내야 한다. 너무 멀리 가면 3번에 돌아올 수 없다.


   무궁무진한 시조의 리듬을 3행으로 가두지 말라. 3행으로 하기에 시조는 너무 넓고 웅숭깊다. 시조의 정형성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리듬의 문제다. 여기서 리듬은 형식으로부터 시작해 의미 형성에 관여하며 리듬이 바로 시조 자체다. 시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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