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8
시조는 음보율이다!
제일 어려운 문제를 앞두고 있다. 오랜 시간 연구에 매진해온 국문학자도, 시력 30~40년이 넘으신 원로시조시인들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 바로 음보율! 명확한 레시피 없이 '감'으로 하는 요리, 음보율!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음보율! 음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시조의 정형성을 정의할 수 없으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초장-3/4/3/4, 중장-3/4/3/4, 종장-3/5/4/3'이라는 음수율을 보완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 음보율이니, 음보율이 시조 리듬의 핵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음보라는 개념이 무척 '수상'하다. 하여, (각 잡고) 음보 개념을 하나씩 추적해보면서 시조의 리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겠다.
일반적으로 시조는 4음보(音步)가 3번 되풀이되어 초장, 중장, 종장 3장(章)을 이루는 동시에, 각 장은 이분되어 전체 6구(句)를 이루고 있다고 정의한다. 이때 시조의 '음보'라는 개념은 서양시의 '음보(foot)'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서양시의 음보는 단어에 나타나는 강약의 규칙에 따른 것이지만, 한국어의 경우 강약의 근거를 들기 어렵다. 사투리의 억양은 남아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시조는 율독에 따른 시간의 등장성(等張性, isochronism), 호흡군(breath group), 통사적 구분, 의미와 문맥 등으로 음보를 설정하지만, 음보의 구분은 아무래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명확한 (산술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중등교과서에 나오는 음보율에 대한 정의다. 문제는 저렇게 음보율에 딱 떨어지는 시조만 교과서에 나온다는 것!
음보는 율독(낭독이든 묵독이든)할 때 숨 쉬는 단위인 휴지(休止)와 띄어쓰기에 의한 것인데, 짧은 휴지는 음보(音譜)에, 중간 휴지는 구(句)에, 긴 휴지는 장(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음보란 휴지에 의해 구분되는 '음성적인 마디(경계)'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될 때 '음보율'이 형성된다!!
여기서 여태까지 휴지의 기준이 되어 왔던 것이 바로 '등장성(等張性, isochronism)'이다! 모든 음절에는 같은 시간이 주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한 음보 안에 들어가는 음절수는 3~4개 정도로 볼 수 있다. 한국어는 2음절 혹은 3음절의 단어가 주를 이루는 교착어(실질 형태소인 어근에 형식 형태소인 접사를 붙여 단어를 파생시키거나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 또는 첨가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조 한 음보에 들어가는 기본 음절수 4음절을 ‘平음보’로, 3음절을 ‘小음보’, 5음절 이상을 ‘長(過)음보’라 규정하여, 이들의 긴장 구조(초장-小/平/小/平, 중장-小/平/小/平, 종장-小/長/平/小)를 통해 시조의 정형미학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음절수는 신축적으로 변형 가능지만, 종장의 제1음보는 3음절, 제2음보는 5음절 이상을 ‘고정 불변의 법칙’으로 지키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 시조인지 시인지 구별하는 법은 바로 종장 제1음보와 제2음보의 음절수를 따져보면 된다. 더 쉬운 방법은 작가의 약력을 보면 된다ㅋㅋㅋ
흔히들 시조시인들은 음보를 '걸음'으로 말하기도 한다. 초중장과 다르게 종장만 걸음걸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음보를 율독할 때 동일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가정한다면, 초중장의 모든 음보가 동일한 4음보격의 가사(歌辭)와 다를 바 없어지며, 다만 종장의 소음보-과음보에 의한 변형만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등장성과 같이 '음성학적 측면'에 의한 등장성은 시조의 종장이나 초중장 모두 4음보로 된 동일한 시행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물론 '단어와 단어는 띄어쓴다'는 띄어쓰기 원칙에 따라 띄어쓰기가 휴지가 되는 부분은 그래도 일정한 편이지만, 율독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호흡과 휴지(休止)는 낭독자의 심리적 상태나 낭독 환경에 따라 매우 자의적이며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말 빠르기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끊어 읽는 휴지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A지점에서 띄어 읽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B지점에서 띄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시조를 시조로 알고 읽을 때 시조의 율격대로 끊어 읽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시조 작품을 두고 시조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읽게 될 때는 4음보를 인식하기 어렵겠지만, 시조라는 사전 정보를 획득하게 되면 어느 정도 규칙적인 음보를 구분하며 읽게 된다.
결국 음보를 '음성학적 측면'인 등장성이나 휴지로 정의하는 것은 이미 그 개념 안에 일정한 규칙을 내포하고 있다는 모순을 떠안게 된다. 이제, 4음보격의 가사와 시조가 어떻게 다른지 음성학적 측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진실만 말하는 거리의 시인들~ you and you W-A-C-K who~ 래퍼의 끊어 읽기는 일반 사람과 좀 다르지yo~(드렁큰타이거,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통사론적 배분+의미론적 분절=?
음성학적으로 음보를 설명하기 어렵다면, 통사적 구분에 따라 음보를 나누는 것은 가능할까. 쉽게 말해 띄어쓰기로 분절의 구간을 정하는 것인데,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결합하는 방식을 추적해가면서 분절(휴지) 지점을 찾되, 그 분절은 문장 구성 요소 상호 간 의미와 문법 관계에 따라 나누면 된다! 과연 가능할까.
여기서부터(진작부터) 나는 '음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디'라는 말을 쓸 것인데, 기존의 음보 개념이 갖고 있는 음성학적 성질을 피해 가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통사 구조 안에서 마디는 최소 단위이면서 전체를 이루되, 이때의 최소 단위는 통사론을 전제로 한다. 즉, 문장은 7개의 문장 성분(주성분-주어, 목적어, 보어, 서술어/ 부속성분-관형어, 부사어 / 독립성분-독립어)으로 나눠져 있고, 문장 어순과 구조도 살피면서 최소 단위를 설정하면서 그 분절 지점을 마디로 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고?
아, 빡센 어학!! 난 대학교 다닐 때 어학 전공만 어떻게든 피해 다녔다. 결국,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ㅠㅠ
자, 그럼 구체적인 예를 들어 통사적 구분이 가능한지 확인해보자. 국어 수업 시간 같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박목월, <나그네>
김소월(feat.주요한) 덕분에 3음보라는 '민요조'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했고, 3음보로 떨어지는 모든 문학작품은 민요조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박목월의 많은 시가 민요조라는 호칭을 얻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이렇게 3음보로 나눴는데, 아주 꼭 그렇게 나눠 떨어지지도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또 이것을 4음보로 나눈 연구자도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그러나 "밀밭 길을", "가는 나그네", "타는 저녁놀"은 엄밀히 말해 통사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는 나누기가 쉽지 않다. '가는 나그네'와 '타는 저녁놀'은 형용사+명사의 조합이니 정말 엄밀하고 깐깐하게 따지면 통사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밀밭길을'은 명사(합성어)+조사다. 조사는 통사적으로 나눌 수 없으니, 4음보로 나누는 것은 무리 데쓰요!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김소월의 <산유화>를 민요조 3음보로 나누려는 무리한 시도를 보라.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갈봄"과 "여름 없이"를 과연 나눌 수 있을까. 김소월의 성격상, '봄여름가을'을 한꺼번에 말하고 싶은데, 시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갈(가을)봄여름 없이'로 썼을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 또한 2음보로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갈봄여름 없이'로 분절 없이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해석은 자유~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통사적 배분과 문맥상 분절을 어떻게 볼 것이냐다. 문장 성분에 따라 아주 엄격하게 통사적 배분(띄어쓰기)을 하면 최소 단위의 마디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곳이 문맥상 분절되는 지점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통사적 배분(띄어쓰기)과 더불어 문맥상 분절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문제는 문맥상 분절 역시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등어 토막 내듯이 시 구절을 토막 내다보면, 시의 중요한 특질인 모호성(ambiguity)과 결정 불가능성(undecidability)이 사라진다. 시는 하나로 해석되는, 정답이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등어 토막은 요리하기 좋게 하는 것이지만, 시를 토막 내다보면, 시는 없고 언어만 남게 된다.
묻고 떠블로 가! 통사적 배분과 문맥상(의미론적) 분절이 가능해지려면 다음의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의미론적 배분이 보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시에서의 호흡과 휴지의 분절이 관습적이든 일반적이든 간에 일정해야 한다. 셋째,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일반인에게 통사적 배분 역시 일정해야 한다. 넷째, 시조의 분절 기준인 마디(음보)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자 드루와 드루와. 이 4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면, 통사적 배분과 문맥상 분절로 시조의 4마디를 나눌 수 있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해 보인다. 첫째, 의미론적 배분은 객관적일 수 없고 둘째, 시의 호흡과 휴지의 분절은 일정할 수 없고 셋째, 사람마다 다르게 배분할 수 있으며 넷째, 분절 기준인 마디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젠장!!
결국, 음보라는 개념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 할 수 있으니, 오호라 통재로구나. 노답일세.
어떡하지 음보, 너?
음보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4마디씩 끊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런데 만약 시조의 불문율인 '종장 제1음보 3음절, 제2음보 5음절 이상'의 문제 앞에서 음보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종장을 건드린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작자의 문제가 아닐까 하지만, 또 그렇다고 무작정 손가락질을 하기도 어렵다.
풀리는 태엽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헛짚어 온 날들을 서둘러 밀어내고
참된 내 자리에 와서 시계가 되어 주길
예를 들기 위해 엉성하게 작품을 만들어 보았다. 시조라는 정보를 미리 드리겠다. 자 읽어보시라. 중장의 "헛짚어 온/ 날들을"로 봐야 할지 "헛짚어/ 온 날들을"로 나눠야 할지 애매하다. 중장은 그렇다 치고, 종장을 한번 보자. "참된 내"라는 3음절 뒤에 "자리에 와서"라는 5음절이 오니 종장 충족 조건을 갖췄지만, 과연 제대로 갖췄는가? '참된'이 '내 자리'를 수식하는 것이니, "참된/ 내 자리에 와서" 이렇게 분절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종장 '3-5'가 아니라 '2-6'이 되므로 종장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즉, 종장만 글자 수로 따지기엔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밤마다 부서진 웃음으로 너에게
하늘에 닿을 때까지 마음에 내릴 때까지
단단한 세상 모서리 있는 힘껏 두드려라
급조한 시니 그냥 예시로만 봐주시길. 초장부터 문제다. 요즘 많은 시조시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그것! 바로 구의 문제. 분명 시조의 한 장은 2구로 나눠져서 총 6구로 나눠져야 한다. 그러나 인용시의 초장은 2구로 나눠지지 않는다. 물론 글자 수로 억지로 나눌 순 있지만, 읽어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부서진'은 '웃음'을 수식하기 때문에, "밤마다// 부서진 웃음으로// 너에게" 이렇게 나눠진다. 3구가 되는 것이다. "밤마다 너에게// 부서진 웃음으로" 혹은 "부서진 웃음으로// 밤마다 너에게"로 고치면 2구로 나눌 수 있으니, 각 장 제2음보와 제3음보 사이가 통사론적+의미론적 분절이 되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종장도 마찬가지. '단단한' 것이 '세상'인지 '세상 모서리'인지 모호하다. 자칫하면 "단단한 세상/ 모서리"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시조 종장이 3음절만 맞추거나 띄어쓰기에 의한 것이라면, ‘시조 종장의 첫 구는 3음절’이라는 내용 없는 형식만 남게 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구를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3음절+5음절이라는 종장 조건만 지키면 장땡인가? 그래서 음보율이 있는 것인데, 결국 통사론적+의미론적 분절이 함께 해야 그나마 시조답게 보일 수 있다. 구 역시 마찬가지. 구를 지키려면 확실히 지킬 것. 글자 수만 맞추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다. 어떡하지 음보, 너?
어떡하지, 음보 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네. (영화 건축학개론)
정리하면, 시조의 리듬을 해명하기 위해 음수율이 처음 도입되었으나, 부족한 부분이 많아 음보율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음보'라는 개념은 한국의 개념이 아닌 데다가, 명확하지도 않다. 이 음보라는 개념에 통사론적 분절과 의미론적 분절까지 포함시키면 그나마 시조의 리듬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것 역시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어떡하지 음보 너? 어떡하지 시조 너?
새로운 시조 리듬론을 기다리며
숨 가쁘게 달려왔다. 시조를 쓰지 않거나 읽지 않는 '일반인'에게 위와 같은 문제가 뭐 대수겠냐만은. 시조를 쓰고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아주 절체절명의 일이며, 목숨을 다투는 일이다! 물론, 글자 수 맞추기에 급급한 작품도 많다. '3-5'라는 종장 조건을 갖췄으니 시조 아니냐고 우기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시조라는 장르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물론, 그 시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문제고. 나는 지금 개인의 만족보다는 시조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다루고자 한다. 작품과 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탓하고 싶은 것은 이런 논의가 아예 없다는 현 실정이다. 시조 연구자는 극히 희박할뿐더러(내가 장담한다. 현재 한국에서 현대시조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10명도 채 안 된다. 손으로 꼽을 수 있다!), 시조를 쓰는 시인들 사이에서조차 논의가 없다. 알아서, 눈치껏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눈치는 누가 주었는가?
시조가 '만약' 앞으로 계속 존속할 문학 장르라면, 당연히 시조 리듬에 대한 논의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1930년대 이병기, 이은상 등 시조부흥론자들의 이론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일보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누가 그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한국 고유의 민족 정형시'라는 이유로 문제 제기를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조는 원래 그런 것이야, 하면서 '철벽'을 쳤으니, 이제 스스로 고립되었다.
시조가 친 철벽에 시조 스스로 갇혔다.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고립될 것이고 박제될 것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는 알렉산더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조의 리듬론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음수율과 음보율. 그리고 통사론적+의미론적 분절. 이 모든 것이 길항하며 시조의 정형미학과 리듬을 만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마디! 시인은 자기의 감정과 충동으로 마디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마디들이 폭발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시의 리듬을 만들어간다. 이 마디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세공하는 자를 우리는, 시조-시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o be continue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