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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Feb 27. 2021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9

#시조는 없어질 장르 #시조는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Chapter. 9
시조는 없어질 것이다!


 

   최근 한국의 여러 문학단체 혹은 학술단체들이 '시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시조가 전 세계적으로 미래 세대에게 유산으로 남길만한 인류 보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조창 가사집으로 가장 오래된 시조 텍스트집이라 할 수 있는 <해동가요>(1763), <청구영언>(1728), <가곡원류>(1876) 등 소위 ‘3대 시조집’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이는 시조가 '한국 고유의 정형시’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일인데, 여기에는 ‘민족’과 ‘전통’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그동안 시조라는 정형시의 존재 이유는 '민족 전통 장르의 계승 및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고려 초중기에 형성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완성되었다는 시조는, 10구체 향가의 3단 구조, 고려 속악가사 분장 형태, 6구 3절식 민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다양한 가설을 토대로 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이와 함께 시조라는 명칭이 '시절가조(時節歌調, 당대에 유행하는 노래)'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시조가 당대의 삶과 세계관을 잘 반영하였다고 보고,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며 이어져온 문학 장르가 시조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이에 따라 시조는 민족 고유의 전통 장르이기 때문에 시조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민족 전통 장르'라는 사실에만 매몰되어 시조는 계승해야 할 민족정신이자 민족의 얼이며,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하는 정전(cannon)의 지위를 누려 왔다.


글로벌 시대, 다민족(다문화) 국가가 되고 있는 한국은 이제 더 이상 '한민족'이라는 말을 하기 어렵다. '민족 장르'라는 말도 마찬가지!


   그러나 균열과 파편화가 미학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21.2세기를 막 지난 현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존재론은 '아시다시피', 위태롭기만 하다. 근대적 주체에 대한 반성과 회의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 아래, 문학은 끊임없이 다양한 변형과 전환을 이루며 무한한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시조는 규범화된 율격이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현대시가 내적 호흡과 자유로움의 극단을 향하고 있을 때, 시조는 엄격한 율격이라는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야 했다. 율격을 벗어나는 순간 ‘시조가 아닌 것’이 되었고, 시조는 항상 ‘시조다움’을 스스로 정의하면서 유지해야 했다. 이는 시조를 고전문학의 영역으로, 전근대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다시 말해, 시조는 ‘전통’이라는 지위는 계속 누릴 수 있지만, 현대와는 결이 맞지 않는 문학 장르로서, 현대에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장르가 되면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늘상 이야기되는 '문학의 위기' 문제 역시 시조의 존재론을 위협한다. 텍스트보다는 영상물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는 지금 세대에게 문학은 과연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활자로 인쇄된 문학보다는 시각적인 자극을 강조하고 있는 영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요즘, 책보다는 넷플릭스, 유튜브를 보는 인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요즘, 책을 읽고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은 '천연기념물'이 되고 있다! 1시간짜리 영상물도 보기 싫어서 5분 미만의 영상 클립(짤)을 보고 있는 현시대에, 누가 더듬더듬 활자를 읽고 고민하겠는가. 시대의 빠른 속도에 점차 뒤처지고 있는 문학 그리고 시조. 과연 어떻게 될까.

   

스마트폰 하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즐길 수 있는데, 굳이 누가 책을 읽겠는가. 하물며 누가 문학을 읽고 쓰겠는가. 이제 '읽는 시대'가 아니라 '보는 시대'다.


고도를 기다리며


   그럼 이제 시조는 없어질까. 시조를 읽고 쓰는 인구가 점차 줄면서 언젠가 사라질 문학 장르가 될까. 신라의 향가, 고려의 가요처럼 말이다. 역사책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시조. 그 날이 언제 올까. 아니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시도 마찬가지고, 다른 다양한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다. '양식(style)'이라는 것이 있'었'다. 각 시대는 그 시대에만 있는 양식이 있다. 바로크, 낭만주의, 고전주의처럼 말이다. 한국의 시와 시조도 '지금은' 유행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시대를 특정한 명칭으로 호칭하며 시와 시조를 당시의 예술 사조로 기억할 것이다.

   없어지더라도, 문학 장르로서 시조가 곧 사라지더라도, 지금 시대에, 지금 우리 한국에 존재하고 있고 있으니, 과연 시조는 어떤 일(기능 혹은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현대시조는 자유시를 주류 양식으로 삼아온 ‘근대’에 대한 재해석과 반성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원형에 대해 탐색하는 기능을 떠맡아왔다. 다시 말하면 현대시조는 그 안에 이른바 탈(脫)근대 혹은 반(反)근대의 열정을 일정 부분 매개하고 있다. 이는 ‘시조성’과 ‘현대성’의 결합을 과제로 내건 현대시조가, 율격의 해체나 이완을 줄곧 보여온 근대 자유시에 대한 반성의 몫을 띠는 양식임을 알려준다. (유성호, 「현대시조의 가능성과 미래」, <정형시학> 15, 2017년 여름호, 28쪽.)

   유성호 평론가의 말처럼, 현대시조가 근대에 대한 재해석과 반성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지적은 주목할만하다. 시조가 잃어버린 원형에 대해 탐색하는 기능을 떠맡고 있다는 말은, 현대사회 안에서 문학과 예술의 역할, 시의 기능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문학이 근대(현대)의 문제를 사유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는 뜻인데, 시조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조의 '정형 미학'일 것이다. 


경쟁사회,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문학은 사회의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멈출 줄 모르는 시대 속도에 제동을 거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문학.


   끝없이 질주하고 팽창하며 해체되는 현대에서 정형을 지킨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로 보일 수밖에 없으나, 정형을 지킨다는 것은 정형에 내재되어 있는 리듬을 믿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오랜 역사를 가진 시조의 리듬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인간(한국인) 보편의 정서와 감정을 다뤘다. 한국인인 이상,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그 무엇보다 시조만큼 우리의 감정을 오래 다룬 것은 없다. 

   4차 산업혁명, 5차, 6차... 이렇게 시대가 매우 빠르게 변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싫어하고 힘들어하고 기뻐할 것(희노애락애오욕)이다. 지친 우리 마음은 각 시대의 오락거리와 다양한 프로그램에 길들여지고 위로받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인간 본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위로를 주고받는 일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찾는 것이 바로 예술이자 문학. 인간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떠서 눈감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주입되는 수많은 정보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의 속도에 우리는, 점차 지쳐갈 것이다. 쫒아가는 것에 한계를 느낄 것이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종종 올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는 '슬럼프'라고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우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예술과 문학이 '짜잔!'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음악이든 시든 무엇이든 간에 그때 예술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않을까. 

   그때까지 예술과 문학 그리고 시조는 살아있어야 한다. 최후에 쓰일 것에 대비하는 것이 바로 문학. 지금은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언젠가 꼭 필요할, 반드시 있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러니까, 예술가들은, 시인들은 그때가 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마치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것처럼.


문학의 쓸모를 기다리는 일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과 같을지도 모른다. 순진한(멍청한) 시인들은 고도를 믿는 사람이다. 기다림 자체. 그것의 힘을 믿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한국어라는 힘


    앞선 매거진 글에서 언급했듯이, 시조는 언터처블, 번역이 불가능하다. 시조의 리듬은 한국어로만 온전히 구현 가능하다! 그리고 시조의 리듬은 단순히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 시조는 한국어의 억양, 강세, 높낮이 등 다양한 운율 요소를 품고 있다. 현재 본인이 석사 때부터 연구하고 있는데, 언젠간 꼭 밝혀낼 것이다. 시조의 리듬은 한국어의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내가 제일 경계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한류' 또는 '세계화'. 시조의 세계화 말이다. 시조의 우수함을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것인데, 그 의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무턱대고 우상화하는 것이다. 왜 우수한지 왜 귀한 것인지 증명도 하지 않고, 무조건 오래된 민족 장르임을 내세우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전략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미학! 미학이 우선되어야 한다. 

    시조의 미학, 과연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아는 것은, 시조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한국어 문학'의 극단에 시조가 있다는 점이며, 여전히 창작되고 있는 문학 장르라는 것이다. 시조의 정형 미학은 '아직까지' 번역 불가능하며 한국어의 다양한 리듬 요소와 그에 따른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때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고유성을 잃지 않고 언어와 문화의 주도권 또는 주체성을 지키는 힘이다. 여기서 한국어의 고유성은 곧 한국인의 고유성으로 치환해도 문제없을 것이며,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일이 어떻게 가치가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한류 콘텐츠는 계속 늘어갈 것이고, 한동안 세계적으로 유행할 것이다. 과연, 'K-시조'도 가능할까?(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통계)


    손끝에 불꽃을 내며 약 3달간 시조 문제만 생각하며 써내려 왔다. 이렇게 아침에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시조만 생각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시조의 문제라는 문제는 거의 다 다룬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시조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장삼이사에게 시조는 몰라도 그만인 것을. 아니, 시조는 곧 없어질 장르가 아닌가. 나는 왜 그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시조의 존재론이 곧 나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시조를 쓰는 시인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당연히 시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계속 시조를 쓸 것이고 연구할 것이다. 이 글이 하나의 선언이자 약속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오해하는 시조의 모든 것. the end.



ps : <오늘부터 쓰시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907786&tab=introduction&DA=LB2&q=%EC%98%A4%EB%8A%98%EB%B6%80%ED%84%B0%20%EC%93%B0%EC%8B%9C%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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