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가장 먼저 접하는 책은 단연 바이엘일 것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 중에서는 자신이 치고 싶은 곡을 위주로 배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 피아노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학원에서 바이엘 책을 받아본 기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이엘은 보통 3권에서 5권 정도로 이루어져 있죠.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바이엘을 치고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왕초보’로 여기곤 했었는데요. 저 또한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장 먼저 연습하기 시작한 책이 바이엘이었습니다.
저는 바이엘을 피아노 학원에서 쳐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 처음 배우면서 바이엘 교본 다섯 권을 미리 연습했기 때문이었죠. 바이엘도 종류가 다양해서 학원마다 다른 교재를 쓰더군요. 그래서 제가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다음에는 체르니부터 치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이엘 교본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곡을 포함하여 여러 연습곡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원곡을 아주 쉽게 편곡하여 교본에 실어놓기도 하죠. 어렸을 땐 바이엘이 단지 책 이름에 불과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바이엘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는 사실을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이엘은 독일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바이어(Ferdinand Beyer, 1803~1863)가 작곡한 연습곡들이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어가 원래 작곡했던 연습곡 모음의 명칭은 Vorschule im Klavierspiel, Op.101입니다. 총 106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이 연습곡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기초 피아노 교육용 교재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원에서 사용하는 바이엘 교재를 보면, 바이엘이 작곡한 곡만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이나 외국의 전통 민요가 있기도 하고, 각종 동요가 함께 있기도 하죠. 바이엘이 작곡한 곡은 ‘바이엘 15번’, ‘바이엘 38번’ 이런 식으로 따로 표기되어 나옵니다. 아무튼 꽤 쉬운 곡들로 이루어진 바이엘 또한 한 명의 저명한 음악가가 작곡한 교본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저는 새삼 놀랐습니다.
이전 화에서 저는 유년 시절의 제가 피아노를 치면서 눈물을 흘린 곡이 두 개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중 한 가지가 ‘워털루 전쟁’이었다면, 또 한 가지는 바로 ‘클레멘타인’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 곡은 제가 사용한 바이엘의 마지막 5권에 있었습니다. 물론 바이엘이 직접 작곡한 곡은 아니었지요. 클레멘타인은 원래 몬트로제(P. Montrose)가 작곡한 미국의 서부 민요입니다. 잔잔하면서도 단조풍의 선율이 흐르는 이 곡을 들으면서 저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나름 감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유년 시절에도 저는 갬성이 넘쳤나 봅니다. 추억을 떠올리면서 오늘은 클레멘타인을 직접 연주해보았습니다. 역시나 그때 느꼈던 애틋함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곡마다 필(feel)이 꽂히는 ‘그 시기’라는 게 있나 봅니다.
바이엘을 떠올리니까 어렸을 때 항상 혼자 평가했던(?) 피아노 난이도표가 생각납니다. 예전에 발행되었던 피아노 책들에는 맨 뒷장을 펴보면 난이도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난이도표를 보면서 나는 지금 ‘초급-중급-고급 혹은 1~6급 중에서 어디에 속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른 친구들을 평가해보기도 하였죠. 또, ‘내가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저 책을 반드시 쳐야 해!’ 뭐,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바이엘을 뗀다는 것은 가장 초급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이엘 다섯 권을 모두 마쳤을 때에는 무척 뿌듯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권도에서 승단 심사를 하고 품띠를 받을 때 가장 설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뭐든지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피아노에 있어서 바이엘은 첫걸음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음악이라는 세계에서 여러분이 내딛었던 그 한 걸음은 어떤 것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