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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족냉증은 어디에서 왔을까

꽤 추웠던 겨울이라는 기억 속에는

by 이준봉

요즘 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새해가 밝아오네요.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계절인 한겨울은 언제나 춥습니다. 제아무리 따뜻한 겨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매해 반복되는 겨울이 올 때마다 저에게는 떠오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피아노 학원입니다. 왠지 모르게 겨울과 피아노 학원은 유독 제 머릿속에 같이 선명히 남아있는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함께 풀어 가볼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인천에 살다가 2학년이 되는 해에 경기도 여주로 이사를 왔습니다. 처음 이사를 와서는 잠깐 친할머니네 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를 온 시기가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제가 처음 하게 된 일은 바로 학원에 등록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원해서 학원에 다닌 건 절대 아니었죠. 어머니께서 저와 동생이 겨울방학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좋겠다 싶으셨기에 학원 등록을 강행(?)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겨울방학 약 두 달간 영어 학원과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직장에 가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집에 계셨을 때면 얼마든지 TV를 마음껏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늘 기다리곤 했는데요.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학원에 가야만 했죠. 그래서 아침에 학원을 후딱 갔다 오자고 생각하여 최대한 일찍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습니다. 제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피아노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론 동생의 손을 붙잡고 나란히 피아노 학원에 갔던 날들이 떠오르네요. 겨울이었던지라 주위에는 눈이 쌓였으며, 가는 길이 추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동생과 매일 피아노 학원에 갔습니다.



피아노 학원에 도착하면 일단 바닥이 매우 차가웠습니다. 양말을 신어도 발은 시렸죠. 저는 아침부터 피아노 학원에 갔기 때문에 학원이 난방으로 충분히 데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습니다. 또, 발만 시린 게 아니었습니다. 피아노를 계속 치다 보면 저절로 손도 역시 차가워지게 되었죠. 요즘은 조금 달라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제가 다녔던 피아노 학원들을 보면 피아노 연습실은 항상 외벽 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창문을 잘 닫아놓고 뽁뽁이를 설치해도 여전히 추웠습니다.


약 한 시간 정도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도중에 손과 발이 시려서 (난로 등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요) 서로 맞대고 비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에게 레슨까지 끝내고 나서 동생과 함께 집에 돌아오는 길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어서 빨리 따뜻한 집에 들어가서 TV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죠. 학원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젤리나 과자를 함께 사 들고 갈 때의 그 기쁨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모를 겁니다. 아무튼,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를 와서도 저는 여전히 피아노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할머니 댁에서 나와 새로운 집에 살면서도 저는 피아노 학원에 다녔습니다. 여름방학에도 겨울방학에도 계속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만, 제 기억에는 겨울이었을 때가 더 많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겨울에 피아노 치기가 더 힘들었기에 기억에 남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피아노 학원들을 다니더라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습니다. 겨울철 아침의 피아노 학원은 언제나 추웠습니다. 실내화를 신어도, 손난로를 주머니에 넣고 가도, 점퍼를 껴입어도, 손과 발은 언제나 드러내놓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한동안 손과 발이 차가운 상태가 유지되니까, 언제쯤부터는 항상 손과 발이 차가운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겨울에 차가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봄이나 가을에도 다른 친구들보다 손발이 차가운 편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족냉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늘 ‘내가 수족냉증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살았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배부르고 등따수운 날은 잘 잊어도, 뭔가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었던 일들은 쉽게 잊지 못하는 듯합니다. 겨울에 손과 발이 시려서 피아노를 치면서 고생하고, 학원에서 끝나고 돌아오며 안도했던 느낌만이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본다면 말입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추운 환경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수족냉증도 많이 완화되어 거의 정상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이따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추운 피아노 연습실에서 손과 발을 비벼가며 피아노를 쳤던 시절이, 동생과 함께 피아노 가방을 메고 학원에 갔던 날들이, 피아노 학원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던 순간이요. 모두 꽤 추웠던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한참을 지나고 돌아보니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운 날들이 있었기에’ 추억으로도 남아있는 게 아닐까? 라고 말이죠.


추위가 수족냉증만을 남기지는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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