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봉 Aug 29. 2021

교육자는 먼저 그 길을 걸어가 본 사람이어야 한다

대학과 스승의 역할에 관하여

     어제는 치과에 방문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치과에 자주 드나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치과 가기가 무서운 것은 여전하다. 그래서인지 미리 무슨 일은 없는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사실, 어제 치과에 갔던 목적은 정기 검진뿐만 아니라, 나의 구강 습관에 관해서  알고 싶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궁금한 점이기에 컴퓨터로 혼자서 관련 지식을 찾아봤다. 그러나 의문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헷갈리기만 했다. 주변 정보는 많아지는데, 정확히 상태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둔 채로 올해까지 참을까 하다가, ‘밑져야 본전인데’라고 생각하며, 치과로 찾아갔다. X-ray 사진을 찍고 간단하게 구강 상태를 점검받았다. 원래 충치를 발견하려고 치과에 간 게 아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충치가 여러 개 발견되어서 치료할 것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이 상황에는 돈이 무진장 깨지게 되었으니 울어야 할지, 아니면 이제라도 발견했으니까 좋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검진이 끝나고 그동안 내가 궁금했던 점들을 치과 의사님에게 여쭤보았다. 질문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하나씩 차례대로 설명해주셨다. 개중에서는 선생님이 직접 경험한 일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는 인터넷 지식인이나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원론적이며 획일적인 정보가 아니라, 사람마다 또 상황마다 달라지는 요소이기에 그런 듯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을 땐, 긴가민가했지만 돌아오면서 이내 의심이 해소되고 안심이 되었다. 궁금하고 답답했던 점이 풀리니까 속이 매우 시원했다. 치과에 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괜히 오지 않았다가, 똑같은 문제로 계속 걱정하면서 신경 쓰게 될 걸 생각하니 아득하다. 충치 치료는 논외로 하고, 일단 나에게 시급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은 것만으로 만족이 됐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전문가’에 관해 숙고해보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고 통하니까 말이다.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은 대학이었다. 사람들이 대학에 왜 갈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20년에 시행한 대학생 의식조사 통계 결과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하는 까닭 1순위로는 ‘유리한 취업을 위해서(51.6%)’가, 2순위는 ‘다양한 경험이 가능해서(14.1%)’, 3순위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고자(13.2%)’, 4순위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9.7%)’라고 한다.[1] 대학을 잘 활용한다면 다방면의 장점이 있을 것이다. 인적 네트워크 확보, 사회성 증진, 강의를 통한 지식 습득, 학위 취득 등등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 교육의 본질은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힘’을 키우는 데에 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낭만적인 이야기냐며 현실을 보라고 종용할 수 있겠으나,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게 시작한다고 본다. 결국, 주체적인 자율성을 확보한 사람만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사람은 평생 공부하며 노동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할 때에 ‘있으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교육자이다.


     학습과 사고는 반드시 대학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공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그런 사람 중에서 굉장히 풍부한 지식을 쌓은 사람도 많다. 또한, 요즘에는 지역의 공공 도서관이 대학 도서관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으며, 온라인이 발달해서 필요한 자료는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 교육만이 가지는 장점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지점에서 ‘교육자’의 존재가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고, 조언을 건네며, 멀리 보도록 안내해주는 교육자가 있냐 없냐의 차이. 이것이 결국 대학(나아가, 모든 종류의 학교)을 대학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가령, 이렇게 사고 실험을 해보자. 두 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만 공부를 한다. 또 다른 학생은 옆에 지도자가 있다. 그 지도자는 이미 학생이 공부하려는 분야에 있어 수십 년을 연구하고 가르친 사람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학생에게는 함께 공부하는 동학(同學)이 있다. 만약, 이 두 사람의 지적 능력이나 시간, 자료 습득과 같은 외적 조건이 똑같을 때, 어느 학생이 공부를 통해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질문을 조금 현실적으로 바꾸어, 누가 더 양질의 책이나 논문을 출판하겠는가?



     확률적으로 본다면 후자가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클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만 봐도 집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데뷔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개 그에 걸맞은 거장에게 사사하였거나 내실 있는 예술학교 혹은 음악원에 재학한 이력이 있다. 모차르트의 스승은 바흐였으며, 베토벤의 스승은 하이든, 리스트의 스승은 체르니였다. 이는 비단 학계나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군대에서의 보직 수행 능력은 선임이나 상관이 어떻게 지도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회사에서의 업무 수행 능력은 사수의 일 처리 방식이나 인수인계의 질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따라서 교육자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막중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전문적 지식’,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능력’, ‘도덕적 품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먼저 걸어간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떠한 길을 걸어가 본 사람은 새롭게 그 길을 걷고자 준비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조언을 건넬 수 있다. 또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묻는 질문에, 본인의 체험과 생각을 담아 대답해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누군가 잘못된 길에 들어선다면 다시 바로잡아줄 수도 있다. 즉, 교육자의 역할은 교과서나 책 혹은 동영상 강의처럼 정량적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학생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배움의 효율과 즐거움이 최대화되도록 조력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할 때야 비로소 대학은 본래의 가치를 되찾을 것이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학생들은 저절로 대학 문을 두드리게 되리라고 본다. 믿고 따를만한 교육자가 있으며, 자신의 배움을 극대화하기까지 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마치 내가 무거운 마음으로 치과에 가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며 ‘치과 가기를 잘했다’라고 생각하였듯이, 누군가 대학(혹은 그 외 어디라도)에 가서 그와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미래의 대학 사회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자가 먼저 그 길을 걸어가 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해줄 말이 있으니깐. 부단히 시도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반복하고……. 이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침내 학자나 교육자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낙하산을 타고 왔거나, 운 좋게 별 노력 없이 자리를 잡는 예외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타이틀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하지만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자는 따로 있다.


     적어도, 나는 먼저 길을 걸어가 본 교육자가 되기를 원한다. 또, 무엇보다도 그러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



Reference

    

[1] “[2020 대학생 의식조사/교육·취업의식] 대학 입학 이유 1순위 ‘취업’, 온라인 강의 콘텐츠 질적 향상 시급”, <한국대학신문>, (2020. 10. 27. 발행).



매거진의 이전글 어무이의 공부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