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17>을 보고, 나의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어느 겨울, 외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목수였던 할아버지는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몸도 곧고 정정하셨고, 귀는 잘 안 들리셔도 손주가 찾아오면 허허 웃으시며 환영해주시곤 했다. 나는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낯가리는 손녀였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미묘한 유대감을 느꼈다. 외할머니의 장례식 날 골방에서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시던 할아버지의 초점 없는 눈빛과 거칠은 손의 감촉.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삶과 아픔에 공감하기는 충분했다.
얼음이 꽝꽝 언 추운 겨울날, 길에서 미끄러지신 할아버지는 패혈증에 걸리셨다. 면역력과 기력이 떨어진 신체는 패혈증의 힘을 빌어 할아버지의 목숨을 좀먹어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할아버지는 그 이후 자식과 손주손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셨고, 아무 말씀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신 채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셨다. 약 일주일의 생지옥동안 모든 가족이 번갈아가며 할아버지를 돌봤는데, 죽어가는 그를 지켜보는 건 너무나도 가혹했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건 그 이후부터였다. 생각보다 죽음은 나의 가까이에 생생하고 강렬하게 존재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내가 아무런 선택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은 좌절스러웠고, 한동안 깊은 우울감에 젖어 인생과 시간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며 답을 찾아 헤맸다.
영화 <1917>은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려는 데번셔 연대에게 공격취소 전령을 정하고자 길을 떠난 영국군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이야기다. 버려진 민가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그들은 추락한 비행기에서 몸에 불이 붙은 독일인 조종사를 구해주게 된다. 그를 편하게 보내주자는 스코필드와 달리 블레이크는 우선 물을 떠달라고 부탁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그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누가 알았을까. 독일군 조종사는 스코필드가 물을 뜨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블레이크를 단검으로 찔렀고, 그렇게 블레이크는 복부에서 울컥 피를 쏟아내며 죽고 만다.
인애가 죽음을 불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전시였기에 죽음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본 영화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쏟아지는 총알이나 부비트랩도 아닌 타인을 도우다 찾아온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조금은 잔인하게 들릴 수 있지만 만약 그 독일군을 그대로 불에 타게 두었더라면, 그를 구해줬더라도 바로 총으로 쐈다면, 블레이크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해 가정은 무의미하고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이 잔인한 이유는 비단 삶의 끝을 맞이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의 남겨진 사람들도 그 고통을 함께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블레이크의 죽음을 직접 지켜본 스코필드와 그로부터 동생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형 블레이크,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맞이한 딸, 아들, 손자, 손녀들. 우리는 모두 다른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상실의 아픔에 허덕이는 우리는 그 죽음의 덫에서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은 어찌 이토록 잔인하며 허무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