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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세 Jan 03. 2021

회사생활은 내 인성을 시험에 들게 한다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고

“우리 마음 속에는 누구나 한 명쯤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출처: 유튜브 <워크맨> 82화


“가끔 길을 걷다가 커다란 유리창을 보면, 돌을 던져서 깨버리고 싶지 않아요?"


대학교 1학년 때 수강한 인기 교양 그리스로마 고전문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가볍게 웃으며 던진 말이었다. 당시 때가 덜 타고 순수했던(?) 나는 일상에서 그렇게 폭력적인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하나의 짧은 영상처럼 그 때의 기억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다. (나는 강의실 오른쪽 앞에서 2번째 줄에 앉아 있었는데, 장난기 넘치게 웃으며 이 말씀을 하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업에서 배운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제치고 이 말이 요즘에 들어서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내 안에 있던 인류애가 말라가는 느낌을 받아서다.




평소 나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굳이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지 않는다.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르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성의 소유자를 만나면 사회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얽히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피치 못하게 계속 부딪혀야 하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특히 나의 경우는 상사가 아주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와 손녀라서 별로 슬프지도 않겠다 하고,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아랫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기 급급하며, 모든 공과 포상은 자신이 꿀꺽하고, 다같이 야근을 해도 저녁을 시키면 저녁만 먹고 퇴근하고, 그마저도 자신이 법인카드를 써야하니 야근을 해도 법인카드는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일을 아랫 사람들에게 시키는데 더 심각한 건 멍청하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남들의 스케줄에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거나 회의를 잡았고, 거의 떠먹여주다시피 오랜 설명을 해줘야만 했다. 그마저도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회사생활을 하며 계속 상사와 부딪히게 되니, 속에서 가끔 천불이 끓어오르고 입도 험해졌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 잘 이해해 마음을 비우려고도 해봤고, 그 사람도 사정이 있겠거니 이해를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게 쉬웠다면 나는 성직자가 되었겠지. 얼굴을 보는 것도 싫으니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가끔 사건이 생겨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할 때 그러한 증오의 표현이 “그 사람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와 같은 극단적인 말로 나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말이라도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면 안되겠다, 하며 자중했지만 사건이 하나 둘씩 쌓이고 나의 개인 엑셀파일에 상사의 만행이 하나둘씩 추가될수록 험한 말은 쉽게 나왔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 속이 후련하니까.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 출처: 리디북스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적 복수심에 현실적인 상상력을 덧붙여준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테드는 히드로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릴리에게 하소연하듯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내 미란다에 대한 배신감에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낯선 이에게는 더욱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테드는 릴리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던 걸까. 테드의 말을 주의깊게 듣던 릴리는 자신이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릴리는 삶의 여러 문제들을 살인으로 해결한 화려한 전적이 있었다. 방향을 잡지 못했던 분노는 행동과 계획으로 구체화된다. 독자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때쯤 소설은 한 번의 분기점을 거쳐 세상에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소설 자체가 뒤를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읽는 즐거움을 위해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 소설은 우리가 막연히 말하는 “그 사람 죽었으면 좋겠어”가 실현될 때 얼핏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약간의 통쾌함도 느껴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에서의 릴리는 매력적인 살인자로 그려지지만 만약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인간 관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살인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은 단순하지만 인생의 많은 가능성을 메마르게 하기 때문이다. 읽는 재미와 생각해볼 지점을 동시에 잡은, 오랜만에 밤을 불태울 수 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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