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2017년까지의 나는 글 쓰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남들이 쓰라면 서론-본론-결론으로 이루어진 논리적인 글을 곧잘 써내곤 했지만 그것은 대학 입시와 인문대라는 전공 특성 상 필요에 의해 써야 하는 것이었지 내가 원해서 쓴 글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은 어느 하나 특별할 것 없이 인터넷과 책, 내 머릿속에서 적당한 주장과 근거들을 긁어 모아 짜깁기한 글일 뿐이었다. 농담 삼아 친구들에게 나는 글을 뽑아내는 기계다, 나무에게 미안할 정도로 종이 낭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엔 꽤 많은 진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유일하게 좋아하던 글쓰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편지"였다.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의 생일 때는 선물도 선물이지만 예쁜 카드를 골라 편지를 쓸 때 더 큰 충족감을 느꼈고, 사랑이 차고 넘쳐 이 마음을 연인에게 전하지 않곤 못 배길 때에도 나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골라 한 통의 편지를 썼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머리와 손으로 정리해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쓸 때 나도 모르게 목 끝까지 차오르는 알 수 없는 벅참이 좋았다. 그래서 지금도 내 서랍에는 언제든 편지를 쓸 수 있는 카드와 편지지가 적어도 세네 개는 자리를 잡고 있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p.26
편지 쓰기를 좋아한 만큼 타인에게 편지를 받는 것도 좋아했다. 나를 생각하며 고른 선물도 고마웠지만 마음과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 한 통이 더욱 소중했고, 어린 시절부터 받은 수많은 편지들은 지금도 봉투와 박스 속에 고이 모셔져 장롱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 많은 진심과 인연 중 특이하게도 꾸준히 내 기억을 건드리는 것은 중학생 때 친구가 주었던 쪽지 같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유추했을 때 나는 아마 장난 삼아 친구에게 빛나는 예쁜 선물과 집, 리무진과 돈을 받고 싶다고 말했던 듯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속물적이었다 싶으면서도 그때는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니 그런 부탁을 참 가볍게 할 수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친구는 내가 준 난관을 슬기롭게 해결해 보였다. 쪽지가 든 작은 지퍼백에는 내 새끼손가락만한 장난감 자동차와 아이들의 공주 팔찌와 반짝이는 구슬, 그리고 집 열쇠라는 말을 덧붙인 영재사관학원의 B7 사물함 열쇠가 들어있었다. 사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고 당시 우리는 굉장히 친하고 편한 사이었기에 내 부탁을 무시하고 넘어갔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방법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이 편지가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바래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는 까닭은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서일 것이다. 15살의 나와 27살의 나는 취향으로나 성격으로나 참 많이 달라졌고, 그 아이도 마찬가지로 변했을 테다. 지나간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해서 예전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가끔은 뚝 끊어져버린 그 인연이 사무치도록 아프고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