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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세 Jul 01. 2019

나의 바바리맨 경험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경험 하나.

학교 앞에는 유명한 바바리맨이 있었다. 수년째 일정 시간, 일정 장소에 출몰해 온 토박이 바바리맨이었다. 이른 등굣길에 짠, 하고 나타나 어린 학생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고, 흐린 날이면 하필 여학생 반인 2학년 8반 교실 창문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공터에 나타나기도 했다. - <82년생 김지영> 中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하교 후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갑자기 낡은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차에 타고 있던 할아버지는 나에게 길을 물어봤고, 한창 친절을 사회화할 시기였던 나는 웃는 얼굴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할아버지의 오른손이 브레이크를 잡는 기어 쪽이 아니라 다리 사이에 가있었다. 온몸은 양복으로 꽁꽁 싸맸는데 유독 할아버지의 몸통 가운데만 살색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저건 뭐지? 우리 아빠가 운전할 때 저런 건 본 적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마냥 나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그걸 만졌다.


'별일 없이' 헤어졌지만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방으로 엄마를 불렀다. 차마 밝은 불은 켜지 못하고 베란다 불빛만 켜 놓은 채 낮에 내가 본 버섯처럼 생긴 무언가를 그렸다. 그리고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 사실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대체 이건 뭐야?

그때야 비로소 그게 남성의 성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길을 물어봐서 친절히 대답했을 뿐인데 무언가 잘못한 듯한 찝찝하고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경험 둘.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듯, 어느 이른 아침 골목에서 일진은 바바리맨과 마주쳤고, 그때 일진 뒤에 숨어 있던 넷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준비한 빨랫줄과 허리띠로 바바리맨을 묶어 근처 파출소로 끌고 갔다고 한다.... 아무튼 이후로 바바리맨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섯 명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 가끔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그 아이들의 머리를 꽁 쥐어박았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 - <82년생 김지영> 中


2017년에 있었던 일이다. 친한 동생 둘과 종로에서 만나 곱창과 소주를 먹고 기분이 좋아져 코인노래방을 가기로 했다. 근처의 코인노래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방이 없어 아쉬운 대로 오락실 안에 있는 조그만 코인노래방에 들어갔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셀카도 찍고 놀고 있는데 뒤에서 싸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품이 크고 너절한 옷을 입은 작은 키의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코인노래방의 창문으로 내 엉덩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나서 문을 열면 도망갔다가 문을 닫으면 다시 돌아와 눈으로 내 몸을 훑던 미친 새, 아니 사람이었다.


그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노래방 문을 열었고 그 사람에게 충동적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그러자 그 개새, 아니 사람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내가 순간적으로 노래방 문을 닫자 그는 내 앞에서 문고리를 난폭하게 흔들며 문을 열려고 했다.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 사람은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사라졌다. 당시 대외활동을 하느라 기숙사에 살고 있던 나는 같이 사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펑펑 울었다. 그 날 내가 화가 나고 속상했던 이유는 비단 오락실 안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정확한 이유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내가 속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문이 열리고 저 남자가 나를 때리면 어떻게 하지? 과연 내가 저 남자에게 신체적인 힘으로 이길 수 있을까? <82년생 김지영>에 나왔던 일진들처럼 나도 대차게 그 사람을 상대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빨랫줄도 허리띠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나는 문고리를 꼭 잡은 채 공포와 무력감을 느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욕했던 것을 나무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을 열고 계속 불쾌감을 표현해도 돌아오던 그 남자에게 내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했을지 묻고 싶다. 나는 그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계속 참거나, 혹은 먼저 자리를 피해야 했을까?


더욱 씁쓸했던 건 같은 층을 쓰는 8명의 기숙사 친구들 중 6명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솔직히 내가 두 남자들의 얼굴과 차림새를 기억하는 만큼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오르고, 내 친구들도 그런 경험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두려움과 분노를 온전히 잊고 살리라는 점이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출처 :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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