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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Nov 21. 2024

'커피 필터'가 선사한 선물

커피 필터로 행복 발견하기

외국 생활에 대한 로망이 한껏 부풀었던 대학교 2학년, 캐나다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긴 10개월을 캐나다에서 보냈는데, 원래 계획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현지인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 해외 생활과 영어공부 두 마리를 토끼를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지 못해 관광 비자로 캐나다에 도착하게 되었고, 캐나다 생활은 꿈꿔온 것처럼 아름답게 흘러가진 않았다. 


첫 2개월은 홈스테이를 하며 여유로운 어학연수생 시기를 보냈고, 이후에는 잘 포장해야 젊은 여행가지,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요, 커다란 가방을 메고 도로를 걸으며 히치하이킹을 하는 불쌍한 동양인의 삶을 살았다5월-8월을 캐나다 서부 농장에서 보냈던 터라, 서부의 강렬한 태양에 새카맣게 탄 피부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부모님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 돌아왔던 날 웬 시커먼 거지 같은 애가 다가와서 깜짝 놀라셨다고. 여하튼 캐나다에서 10개월을 보내며 외국 생활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 났는데, 이후로 몇 년간 굳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충격이 꽤나 컸던 듯싶다. 이제와 다소 암울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좌충우돌하는 중에도 외국 생활의 낭만을 느꼈던 순간들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매 순간 커피가 큰 기여를 했던 것 같다

 



홈스테이로 머물던 시기는 캐나다 사람들의 여유를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처음 머물렀던 도시는 밴쿠버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켈로나라는 중소 도시였다. 은퇴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도시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내 나름대로는 활기차고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홈스테이 가족도 친절했고, 어학당 친구들도 사귀었다. 하지만 나의 내성적인 성향과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항상 벽이 느껴졌고, 아름다운 도시 켈로나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쓸쓸함에 한국 가요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홈스테이 집에서는 일요일에 가끔 특별한 아침 식사를 했다. 바로 아침에 사 온 도넛과 갓 내린 커피를 즐기는 것. 집주인 부부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8시쯤 일어나 차를 타고 도넛가게에 들러 도넛을 사 오고 커피 메이커에 새 원두를 담아 커피를 내렸다. 갓 내린 커피를 각자 잔에 담아 취향에 따라 우유나 생크림을 추가하고 도넛과 함께 먹는다. 이 시간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평일에는 각자 스케줄대로 아침을 먹고 나갔던 주인 부부의 자식들도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달콤한 도넛 한 조각, 향긋한 원두커피 한 모금이 만들어내는 최상의 조화를 음미하며, 소소하게 오가는 가족 간의 대화를 듣던 그 순간이 매우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메뉴인데 이렇게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니 특별한 순간으로 각인됐다. 지금 생각하면 향기로운 커피 향이 그 순간을 한층 미화시켰던 것 같기도. 실상은 가족들 사이에 낀 어색한 외국인 홈스테이 학생이었지만, 행복한 가정을 엿보는 방관자처럼 그 순간을 함께하는 동안 한국의 부모님이 생각나고 새삼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왔다. 

 

홈스테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집주인 부부가 켈로나 다운타운의 저녁 거리를 안내하겠다고 해 함께 나간 적이 있다. 거리의 상점과 음식점을 소개해주던 부부는 나를 한 조그마한 카페로 데리고 들어갔고, 우리는 디카페인 커피를 한잔씩 주문했다. 아마도 내가 처음 접해 본 디카페인 커피였을 것이다. 늦은 저녁에 굳이 카페에서 들어가서 커피를, 그것도 카페인을 뺀 디카페인 커피를 굳이 먹다니. 사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어학연수생 입장에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어둠이 깔린 다운타운 거리가 내다보이는 바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가 커피 한 모금 마셨다가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가던 부부의 모습을 보니, 이런 편안하고 낭만적인 장면은 디카페인 커피가 존재했기에 가능하구나 싶었다. 이들을 지켜보며 나도 중년이 되었을 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저녁 거리를 산책하고, 조용하고 작은 동네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0개월 간의 여행은 서부 밴쿠버에서 시작해 조금씩 대륙을 횡단하여 동부 토론토에서 마무리했다. 마지막에 머물렀던 토론토는 캐나다의 경제 도시로 불리는 대도시였다. 높은 건물도 길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직장인들도 많았다. 당시에는 생활비를 벌고자 한국인 식당에서 불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이 고되고 겨울이어서 추웠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회색 빛 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일터와 집을 왔다 갔다 하고, 이해도 잘 되지 않는 TV 프로그램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며 ‘나 잘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수시로 올라왔다. 이때 따뜻한 헤이즐럿 커피 한 잔이 내 안에 온기와 생기를 공급해 줬다. 일하러 나갈 때 한 카페에 종종 들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주문했던 이후로 대체로 따뜻한 헤이즐넛 커피를 주문해 픽업했다. 커피를 들고 길거리를 걸으면 고소한 헤이즐럿 향이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아 마치 내가 거리에 커피 향을 묻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헤이즐럿 향을 머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삭막한 토론토 풍경에 따스한 색이 입혀졌고, 내 마음도 훈훈해졌다. 커피를 한 손에 쥐고 토론토 거리를 걸어가면 마치 내가 외국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고,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자는 다짐이 절로 올라왔다. 

 



캐나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큰 동기는 내가 속한 환경이 바뀌면 나도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이었다. 즉 외국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 내 모습이 아니라, 외국 스타일을 가진 어떤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환상이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지 나는 나였고, 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했기에 외국 생활이 실망스러웠다. 외국에서는 쉽게 행복해질 것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행복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내가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 보니, 어쩌면 행복은 커피 필터를  씌우는 작은 수고만 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구나 싶다. 비단 커피만이 아닐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행복을 발견하게 해주는 필터가 내 주변에 널려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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