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에디터 SU 박서령입니다.
모두 기나긴 밤을 잘 보내고 계시는가요? 이른 초저녁을 넘기면 금세 찾아오는 어스름. 그 고요한 시간에 여러분은 무얼 하시나요? 아마 고단한 몸을 녹이거나,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거나, 혼자만의 여가를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실 텐데요. 모두가 불을 끄고 이불속으로 들어갈 때,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달빛의 환상을 기록해온 작가, 에도가와 란포입니다. <황금 가면>, <빨간 방> 등의 저자로, 일본 미스터리 추리 소설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 사실 그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인데요. 그가 매우 사랑한 추리 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에서 영감을 받아 ‘에도가와 란포’가 탄생했다고 해요. 그가 얼마나 추리 소설을 사모했는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에도가와 란포는 어떤 작가일까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단순 추리 소설이 아닙니다. 그는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리 사건과 비범한 탐정 외에, 미스터리한 인간 그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미지의 존재임을 일찍 깨달아, 그 존재의 무수한 비밀을 파헤치려 노력한 것이죠. 그의 어록 중 유명한 말이 있죠. 그가 팬에게 사인해줄 때마다 적은 문구이기도 한데요. 바로 “현세는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입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밤에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이 ‘진실’이라는 것이죠.
인간에 대한 란포의 끊임없는 탐구 덕에 그는 미스터리 사건을 추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추리하는 것에도 대가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아주 예민하고 자극적인 감정을 건드려, 기어코 페르소나를 벗겨내는 것. 그것이 에도가와 란포의 힘이겠죠. 물론 란포에게도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의 소설이 인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만큼, 자주 검열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나 거북할 만큼 직설적인 묘사,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는 이유에서였죠. 어쩌면 그의 소설이 인간이 숨기고자 했던 본능을 깊이 건드려서, 독자들이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평을 받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란포만큼이나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았던 독자들은 오히려 그의 글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55년, 란포의 환갑을 맞아 일본의 추리 소설 신인상 ‘에도가와 란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소설에 스며든 란포의 매력을 알아볼까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일본 환상문학선집 시리즈의 <에도가와 란포>입니다. 란포의 단편소설 여섯 편을 엮은 책이죠. 저는 이중 란포의 스타일이 가장 확연히 드러난 세 편을 중심으로 얘기해보려 합니다.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는 주인공이 우에노 동물원에서 묘한 남자를 만나며 시작됩니다. 부랑자 같은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원숭이를 놀리다가 갑자기 주인공에게 말을 겁니다. “원숭이라는 놈들은 어째서 상대방을 흉내 내고 싶어 할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짧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도쿄 한가운데, 마루노우치 거리에 있는 건물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에 대해 말이죠. 살인사건이 벌어진 그 건물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빌딩입니다. 하필이면 맞은편 건물 역시 괴괴한 느낌을 풍겨 그 주변을 스산하게 만들죠. 첫 번째 죽음은 중년의 향료 브로커가 삼끈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다음 세입자, 그다음 세입자까지 죽으면서 살인사건이 된 것이죠. 이 단편소설에서 란포가 주목한 것은 ‘모방’입니다. 원숭이에게 칼을 뺏긴 여행자가 나뭇가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칼로 제 목을 그은 원숭이처럼. 모방의 본능을 이기지 못한 인간의 슬픈 숙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묘한 남자와 메라 박사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다음으로 「일인이역」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T’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관찰자 시점으로 기상천외한 유희를 일삼는 ‘T’의 일화를 서술합니다. T는 미인의 아내가 있음에도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방탕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또한, 그는 무직의 한량이며 댄스, 연극, 피아노 등 그 언저리를 돌며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물이죠. 란포는 이 자유로운 T를 통해 인간의 ‘질투’를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랬듯 T는 지루함을 깨고 새로운 재미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방탕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기이한 유희를 꾸밉니다. 어느 날, T는 콧수염을 붙이고 새 옷을 입은 뒤 집으로 돌아갑니다. T는 깊은 잠에 빠진 아내 옆에 누워, 아내가 그의 변장한 콧수염을 만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낯선 이의 이니셜을 새긴 시가렛 케이스를 두고 떠나죠. 다음날 아내는 자신과 함께 보낸 남자가 낯선 누군가라는 사실을 깨닫고 창백해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던 중, T는 아내가 낯선 사람에게 호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리라 믿은 아내가 막상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T는 그 다른 이가 변장한 자신임에도 질투를 하게 됩니다. 자기 꾀에 넘어간 거죠. ‘질투’라는 감정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얽매여버린 T. 이들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요? T의 아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마지막으로 「목마는 돈다」는 나팔 부는 중년 남성 가쿠지로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과거 고향 마을 사진관의 인기 악사였던 가쿠지로는 관현악의 등장으로 가두 광고나 도보 악대로 전락합니다. 그 이후 현재는 목마 한가운데 마련된 무대 위에서 나팔을 불죠. 그는 제 삶을 한탄하면서도, 추레한 목마관을 아지트처럼 여깁니다. 낡은 공동주택의 아홉 자 두 칸짜리 방보다 목마관의 별천지가 낫고, 괄괄한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들도 없으니 말이죠. 무엇보다 퇴근길을 함께 할 오후유라는 젊은 여직원이 있기 때문이지만요. 그는 초라하고 가난한 오후유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끼며,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지고 싶다는 숄 하나 못 사줄 정도로 빠듯한 형편과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죠. 그러던 어느 날, 목마관에 나타난 젊은 사내가 오후유의 하의 뒷주머니에 흰 봉투를 끼워 넣습니다. 가쿠지로는 분명 흰 봉투가 연애편지일 거라 확신하고,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그녀 몰래 흰 봉투를 훔칩니다. 그런데 웬걸, 봉투 안에 든 건 연애편지가 아닌 십 엔짜리 지폐 열 장입니다. 그 순간 가쿠지로는 깊은 희열을 느끼며 오후유에게 숄을 선물하는 상상을 하죠. 젊은 사내는 어째서 오후유의 주머니에 돈 봉투를 숨긴 것일까요? 돈을 얻은 가쿠지로는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까요?
제가 소개한 세 작품 모두 결말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내처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우리가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심리에 주목합니다. 극적인 사건, 압도적인 몰입감, 간단한 문체를 단편소설 안에 집약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란포의 소설은 호흡이 너무 가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아 가독성이 뛰어납니다. 또한, 그의 다양한 서술 방식과 인물 설정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죠. 제가 가장 매료된 란포의 장점은 인물 설정입니다. 란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우렁잇속이라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독자조차도 주인공을 쉽게 믿을 수 없어 읽는 내내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되죠. 반대로 주변 인물들은 평범하거나 영리한 사람으로 설정하여 각 인물의 무게중심을 맞춰줍니다. 그 치밀한 계산 덕분에 독자들의 흥미는 커져만 가죠.
인간 그 자체를 논했던 추리 소설계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달빛이 요술을 부린다고 믿었던 에도가와 란포의 환상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네요. 그의 몽환 세계를 여러분도 즐길 수 있길 바라며 책 소개를 마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podbbang.com/ch/1778729?e=23955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