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고 환난 안에서밑바닥까지 추락하여초라해진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곁에 남을 단 하나의 인연은 반려견뿐이다.
내가 가장 미천했을 때,
내가 가장 절망했을 때,
내가 가장 빈곤했을 때,
내가 가장 고독했을 때,
내가 가장 아팠을 때,
그 모든 순간에 도솔이는 언제나 나와 함께했다.
개는 결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사랑과 이별을 반복할 때마다 도솔이는 나만큼 분주했다.
새로운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그녀에게 도솔이를 소개하는 일로, 동시에 도솔이에게는 새로운 엄마와 인사 나누는 일로서 전개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연애의 태동기에는 도솔이와 함께 하는 ‘한강 데이트’가 항상 예비되어 있었다.
나는 ‘꽃보다 예쁜’ 우리 도솔이를 가운데 두고, 그녀와 함께 걷는 한강 데이트가 좋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줍게 손을 맞잡고,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설렘으로 긴장하는 새내기 연인들.
함께 나들이 나온 총총걸음의 반려견들은 수줍은 연인들의 마음에 발랄한 동심을 선물한다.
그로써 연인들은 맞잡은 손의 경직을 풀고 그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싱그럽게 입맞춤하며 달콤한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연인들은 자기 애인이 사랑하는 애인의 반려견에게 ‘새엄마’ 혹은 ‘새아빠’가 되어줄 것을 약속하면서 애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신한다.
놀랍게도 우리 주변엔 동네 공원에서 산책하던 남성 견주와 이웃 여성이 반려견의 안부를 물으며 ‘스몰 토크’를 나누던 인연으로 연애를 시작하기도 하고, 다투던 연인들 사이에 다짜고짜 반려견이 끼어들어 재롱을 피우는 탓에 얼떨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관계 전환의 국면을 맞이하여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개들은 네발 달린 ‘결정사(결혼정보회사)’이고 신통한 ‘커플상담 전문가’ 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좋은 날들만 있을 순 없었으니, 젊은 혈기에 사소한 의견대립으로 서로의 마음에 칼날 같은 말들을 던져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긴 침묵으로 밀쳐내며 각자의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다툼에 대한 상대의 책임인정을 구걸하는 비겁한 일들이 계절마다 한 번씩은 찾아왔다.
서로를 비난하며 먼저 전화해 오길 기다리는 반목의 날들이 며칠씩이나 지속되는 가운데, 여자친구는 여전히 나를 미워하면서도 도솔이를 보러 찾아왔다.
그녀의 체면을 지켜주지 못하고 먼저 전화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를 지금은 깊이 반성한다. 그 전화 한 통이 무어라고 당시에는 핸드폰을 만지작대면서도 사활을 걸고 통화버튼 누르기를 애써 외면했다. 이기적이었던 그 오만함의 죄는 하늘과 땅에 차곡차곡 퇴적되어 그 벌을 지금 나는 홀로 된 적막감으로써 받고 있다.
여자친구가 도솔이를 보고 싶다며 찾아온 날이면 도솔이는 그녀와 나 사이를 오가며 나 대신 반성하는 마음을 그녀에게 전해주기 바빴다. 눈치가 빠른 도솔이의 노력과 애교 덕에 우리는 얼떨결에 화해하곤 했다.
도솔이는 엄마와 아빠의 키스를 늘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빠 보다 나은 아들에게 나는 늘 미안했다.
애견 카페. 엄마와 아빠를 쳐다보며 행복하게 활짝 웃는 도솔이.
사랑의 시작점보다 이별의 종착점에서 도솔이는 더 분주했다.
도솔이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한 그녀의 약속이 바람처럼 흩어진 날에 나는 도솔이와 단 둘이서 한강으로 나갔다.
늦가을, 바람 부는 한강은 시리고 황량했다.
오늘따라 도솔이의 발걸음이 느리다.
신발을 신지 않는 도솔이에게 더 차갑게 느껴졌을 늦가을 한강의 냉기가 도솔이를 움츠러들게 한 걸까.
아니면 늘 함께 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낯설고 공허한 것일까.
도솔이는 모든 걸 알고 있구나.
영민하게도 한 사람의 빈 공간을 그리워하며 신명을 잃은 도솔이의 발걸음에 섬뜩했다.
도솔이의 가슴팍과 엉덩이를 양손으로 감싸 안아 내 품 안으로 안아 올렸다.
도솔이가 미끈하고 따뜻한 혀로 내 코를 핥아주었다.
도솔이에게 어림잡아도 최소 수천번은 건넨 말을 한번 더 전한다.
<도솔아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리고 나선 도솔이의 도톰한 입 주변 머즐부위에 <부르릉>하고 입방구 소리를 내며 뽀뽀세례를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별한 나의 비애감보다 도솔이가 감지하고 있을 상실감에 더 아프고 미안했다.
엄마와 셋이서 함께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했던 도솔이에게 다시금 엄마의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된 형편에 나는 도솔이에게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도솔이를 가슴에 안고 눈빛만으로 대화하다가 문득 소리 내어 도솔이에게 질문을건넨다.
"엄마보고 싶어도솔아?"
도솔이가<갸우뚱~ 갸우뚱~> 고개를 좌우로 꺾어가며‘물음표’ 포징을 선보인다.
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이해하려고 애쓰는 도솔이의 애정이 담긴 노력이다.
개는 환경과 사물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시각정보보다 청각정보에 더 크게 의존한다. 견주가 이야기할 때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는 반려견이 견주의 입에서 발화되는 소리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난다.
이른바 ‘갸우뚱’하는 심쿵 포인트는 반려인의 말을 열심히 들으려고 귀의 각도를 치밀하게 조정하는 반려견들의 정성 어린 반응이다.
반려견들이 우리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랑의 제스처’인 것이다.
도솔이 <갸우뚱>
더욱 살갑고 러블리한 포인트는 내가 말할 때 도솔이가 이따금 ‘눈썹 근육’을 씰룩일 때다. 물론 개들에겐 눈썹이 없지만, 있다면 마땅히 눈썹이 있어야 할 바로 그 눈두덩이 위쪽의 위치에서 도솔이는 마치 눈썹을 씰룩거리는 듯한 안면근육의 움직임을 종종 표현한다. (반려견을 키우는 견주들은 누구나 자기 반려견의 눈썹 근육을 인지하고 있다)
개는 늑대의 유전형질을 물려받아 늑대와 그 기질적 특성을 많은 부분 공유하지만, 인간과 무려 1만 년의 시간을 함께하면서 늑대와 차별화되는 특질 또한 발전시켜 왔다.그중 하나가 바로 개가 가지고 있는 ‘내안각 거근’과 ‘위안각 후인근’의 안면 활성도다.
개에게는 눈썹을 올리는 ‘내안각 거근’과 눈꼬리를 귀 쪽으로 당기는 ‘위안각 후인근’이 발달해 있다.
개는 자신이 신뢰하는 동료에게만 눈을 마주친다.
무리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동료와 적극적으로 눈을 마주치기 위해 시선을 컨트롤할 때 개의 ‘내안각 거근’과 ‘위안각 후인근’은 활성화된다.
늑대에겐 없다.
도솔이를 품 안에 안고 걸으며 대화하다가 수양버들 아래 벤치에 도솔이를 잠시 내려놓고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 보고 응시하던 눈의 위상이 달라지자 도솔이가 눈을 상방으로 치켜뜨며 옆자리의 나를 지속해서 주시한다.
빼꼼올려다보는 강아지 눈빛은 견주들만이 아는 반려견들의 <심쿵 포인트>중 하나다.
이 ‘올려다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안면근육이 바로 ‘내안각 거근’이다.
늑대에겐 없다
개는 자기 자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유일한 생명체일 것이다
<조시 빌링스> 미국의 작가 1818~1885
재미로 그려본 도솔이 눈썹
실제로 개들은 안면근육을 활용하여 눈을 초롱초롱 동그랗게 뜨기도 하고 가늘게 혹은 서글서글하게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가며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안면근육을 활용한 개들의 눈 모양의 변화는 인간과 더 잘 소통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듀케인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내안각 거근’과 ‘위안각 후인근’은 늑대가 개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교감하는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생물학적으로 이런 진화는 수백만 년이 걸리기 마련인데, 개에게서 발현된 안면 근육의 변화는 수십만 년에 걸쳐 상대적으로 매우 단기간에 일어난 진화 현상으로 이례적인 경우라고 한다.
진화의 목적성에 따라 개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은 결과론적으로 늑대보다 사람과 더 유사한 형태로 진화했다.
‘내안각 거근’과 ‘위안각 후인근’ 은 오직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발달해 온 근육이기 때문에 개는 사람의 감정과 그에 따른 표정의 변화를 이 두 가지 근육을 활용하여 오랜 시간 모방하고 학습했다.
반려인들이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의 마음상태를 눈빛만 봐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너스레가 아닌 사실이다.
도솔이와 단둘이 남겨진 계절이 찾아오면 나는 도솔이와 마주 보며 오래도록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처받은 아빠를 밤마다 상담해 주고 지켜봐 줘야 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도솔이는 늦은 새벽까지 결코 먼저 잠들지 않았다.
청명한 밤공기와 피톤치드 향이 가득한 평화로운 숲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은은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그저 오래도록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 불꽃의 아른거림과 온기에서 치유를 얻는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불멍’이라고 부른다.
적막한 밤이 오면 둥근 주광색 수면등을 조도를 낮추어 그윽하게 켠다.
어느새도솔이가내가 있는 이불 안으로 쏘옥 파고 들어와 함께 눕는다.엉덩이를 내 가슴팍으로 들이밀어 밀착한다.
안정적인 자세로 둥글게 몸을 말아 잠 잘 준비를 마친 도솔이의 새하얗고 보드라운 뒤태를 바라볼 때 나는 불멍보다 따듯한 포근함을 느낀다.
도솔이가 선물하는 ‘불멍’보다 따뜻한 ‘개멍’이 주는 치유의 힘으로 나는 시련의 계절을 버티어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