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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산통 없이 낳은 아들

by 리카르도

“얘는 고양이예요? 개예요?”

페키니즈 ‘도솔’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피에로’에요.라고 답하고 싶지만 "개예요"라고 대답한다.

2009년 8월. 신록이 도심을 푸르게 채색하고 있을 때, 나는 경계성인격장애와 우울증으로 시들어만 가고 있었다. 적대하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와 타협할 수 없었고, 자기 파괴적인 생명현상의 모순성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삶을 이제는 그만 갈무리할 때가 왔다고 작정한 즈음이었다. 내 눈앞에 생경한 생명체 하나가 나타났다.

페키니즈였다.

페키니즈를 보자마자 나는 이 어설픈 생명체가 내 영혼의 단짝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도솔이는 페키니즈 남아다.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타원형의 눌린 얼굴에, 설상가상으로 코는 함몰되어 측면에서는 당최 보이질 않는다. 좌우로 사정없이 넓게 벌려진 입과 그 입 주변의 도톰한 살덩이 그리고 함몰된 코가 익살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머즐 부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 막히는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그렇다. 페키니즈의 얼굴은 피에로를 닮았다.

나는 연극무대가 아닌 도심 한가운데에서 네 발 달린 피에로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캐릭터의 본질이 웃픔(웃기고 슬픔)인 피에로는 가여운 내 청춘의 상징이다.

피에로의 과장된 표정은 내 청춘의 희로애락을 닮아 안쓰럽고 또 사랑스럽다.

피에로의 웃음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자들의 울음이고, 피에로의 울음은 실패하고 넘어지고 조롱당한 자들이 또다시 세상에 내동댕이쳐질 때 다시 일어서는 웃음이다.

웃음과 울음 간의 긴장은 피에로의 화려한 색조 분장 안에서 끊임없이 출렁인다. 이따금 피에로가 박장대소하며 웃을 때, 그 웃음 사이로 넘쳐흐르는 눈물은 외로움이 편만한 이 시대를 연민한다.


영화 <조커>에는 피에로 분장을 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붉은 슈트를 입고 슬럼가 골목의 긴 계단을 춤추며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표정 연기와 해학을 품은 춤사위에 가슴 뻐근한 울림이 있어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반복 재생해 본 이들은 공감하리라. 웃픈 얼굴의 피에로가 주는 위로의 위대함을.


그런데 요리조리 아무리 둘러봐도 페키니즈는 피에로의 화신인 듯 보였다.

페키니즈의 얼굴에는 어릿광대같이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과장된 미소와 위트가 있고, 동시에 왠지 모르게 측은지심을 발동하게 하여 안쓰러워 보듬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모순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적 미스터리가 각인되어 있었다.

영화 <조커>에서.
They laugh at me because I am different. I laugh at them because they’re all the same.
사람들은 내가 다르다고 비웃지. 나는 사람들이 다 똑같아서 비웃는 거라고.


영화 <조커>에서


페키니즈만의 형상적인 매력을 한마디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그들의 비현실적인 가로형 안면 골격과 눈코입 간 배치의 익살스러운 부조화라고 답변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페키니즈들의 성격적인 매력은 역사적으로 황실견 출신답게 시크함과 도도함을 그 베이스로 가져가고, 그 시크함이 자기 기분에 따라 종종 넘치는 발랄함과 끼 부림의 애교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발산된다.


도솔이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살면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영적인 기쁨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해하게 된 바로는 그것은 일종의 뜨거운 부성애의 폭발이었고, 처음 맞이하는 이종(異種)간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미지의 설렘이었다.


그때 솜털같이 작고 따뜻한 도솔이를 내 품에 안고서 나는 내가 다시 자해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전도솔!

너는 내 아들이다. 가슴으로 낳은 내 아들이다.



그렇게 산통 없이 나는 도솔이를 낳았다. 시들어만 가던 내 삶은 도솔이와 함께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제목 -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김완선 노래)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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