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이와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미세한 감정선까지 교감하는데 성공적이란 뜻이다.
조금 철학적인 해석이지만 양상 논리(modal logic)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도솔이와 나만의 이토록 사적인 언어는 도솔이와 나. 둘 만으로 이루어진 ‘어떤 다중우주’에서 모국어로 기능할 것이기에 소중하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한 가지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도솔이를 만나기 전에는 ‘교감’이란 단어를 혐오하는 부류의 아둔한 사람이었다.
비트겐슈타인 때문이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 철학자. 1889~1951)
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작 <논리철학논고>를 용기 있게 탐독해 본 사람이라면, 저 문장 하나를 암송하고는 차오르는 철학 뽕에 겉멋이 들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논리철학논고>의 95%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저 명제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해설할 수 있게 된 초짜들이 누구나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는 지성인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유명한 언어철학적 명제이다.
나도 그랬다.
그리하여 내가 5%쯤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이렇했다.
영어나 한국어와 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자연언어들은 논리적이지 못한 문법적 골격 때문에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한계를 갖는다. 실재를 왜곡 없이 온전하게 비추어 드러낼 수 없는 마치 깨어진 거울과도 같은 언어로 우리는 대화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혼선을 잉태하고 있는 자연언어는 종국에는 소통을 매개하기에 실패하여 서로가 서로를 고립된 섬에 가두게 된다. 그러므로 실재를 왜곡하는 자연언어는 응당 폐기하고 기호논리학과 같은 인공언어로 언어의 논리적 골격을 정초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말을 할 땐 최선을 다하여 논리적인 명제 형태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따라서 말도 아닌 ‘교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전기(前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조차 따지고 들어가 보면 녹록지가 않은 난해한 일인데,
‘교감?’
‘동물과 사람 간의 대화라고?’
도솔이를 키우기 전에 TV에서 동물농장을 볼 때마다 나는 사회자들의 대화 속에서 퇴행성 인지 장애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종류의 정신질환이 창궐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참으로 멍청했다.
아둔했다고 밖에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때 나는 동물과의 ‘교감’과도 같은 종류의 그 어떤 비언어적인 방식의 소통도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논리의 뼈대를 적확하게 품고 있는 명료한 문장이나 선명한 말들이 아니면 무가치하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정반대다. 오히려 일정 수준으로 모호성을 품고 있는 비언어적인 소통방식 안에 참된 공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교감’의 방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열등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소위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을 군더더기가 없는 스키니한 명제 형태로 전달하는 고등한 언어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편협한 생각은 내가 한국멘사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스무 살 나이에 더욱 공고해졌다.평소에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 고구마 10개를 꾸역꾸역 삼킨 것 마냥 가슴이 답답했는데, 멘사회원들과 모여서 대화하면 마치 거울을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편했다.
나와 언어적 DNA가 동일한 언어 쌍둥이들을 동시에 여럿 만날 수 있는 멘사 모임은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반추해 보면 그때 우리들의 대화는 다소 전투적이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극강의 ‘NT’ 기질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던 우리들의 대화는 마치 알고리즘화된 연산집합처럼 논리 정연하고 간명하고 또 속도감 있었다. 송곳처럼 예리한 질문들과 수술용 매스 같은 적확한 대답들이 오갔던 대화는 따뜻한 공감보다는 명석함을 지향하고 있었다.
(오해는 마세요. 멘사 사람들은 다 착했어요. 말투만 그랬답니다.)
결론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멘사 뽕에 취해 ‘NT’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나는 점점 소통이 어려운 장외 인간이 되어갔다. 사회지능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공감 장애’ 환자가 되어 참된 소통에 자주 실패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 타령이나 하며 공감 능력이 바닥인 나 스스로를 아무 문제없다며 합리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내 옆에 있어 준 친구들이 몇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 친구들은 오히려 오만하고 멍청했던 나를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고 또 따뜻하게 포용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도솔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선명하게 깨달았다.
도솔이와의 ‘교감’을 토대로 언어에 대한 나의 세계관은 변화되었다.
내가 구사하던 적대의 언어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도솔이로부터 전수된 ‘교감’이라는 제3외국어 실력으로 나의 공감 능력은 획기적으로 확장되었다.
‘공간 지각력’ 하나로 지능을 테스트하는 멘사에서 발견하지 못한 ‘공감 능력’의 발견으로 나는 고질적인 대인관계문제와 의사소통문제를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 있었다.
도솔이와의 교감을 통하여 내가 뒤늦게나마 깨달은 소통의 본질이란 이렇다.
‘참된 소통’이라 함은 내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전달하고 그로써 효과적으로 설득되길 기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된 소통’은 먼저 상대의 마음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상대가 구사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성조와 톤 그리고 표정을 비롯하여 몸짓에 이르기까지 비언어적인 메시지들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의 총체성을 토대로 상대와 밀도 높은 공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그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비트겐슈타인을 동경하지 않는다.
세기의 천재인 그는 전통 형이상학을 전복시킬만한 기념적인 분석철학을 창안하여 ‘언어철학적 전회’의 계기를 철학사에 남겼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도솔이와 나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
도솔이와 나 사이에 실재하는 농밀한 의사소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그의 언어철학은 진리일지언정 나에겐 무용하다.
화려한 양화양상 논리학으로 전개되는 현대영미분석철학보다 나에겐 도솔이의 개 짖는 소리가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
논리적인 언변보다 향기가 피어오르는 말들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Language is the source of misunderstanding.
언어는 오해의 근원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프랑스 소설가. 1900~1944)
서울. 애견카페에서
‘교감’을 토대로 한 비언어적인 소통방식을 나는 사랑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적확한 말보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무언의 공감을 사랑한다.
그렇다. 사실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이들은 모두 지극히 사적인 그들만의 교감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단언컨대, 반려견과 견주들 사이엔 제가끔 제3외국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반려견과 부단히 ‘교감’할수록 우리들이 구사하는 제3외국어의 번역 실력은 정교해진다.
나에게 있어서 도솔이와의 ‘교감’은 경계성인격장애로 문제가 많았던 대인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매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언어적 선명성만을 추종하였던 내 삶에 상징적인 균열을 일으킨 도솔이와의 농밀한 교감은 내 삶의 방향성을 완벽하게 바꾸어놓았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도솔이의 ‘짖음’과 ‘표정’에 납득할만한 그 나름의 문법이 존재함을 이해하고 나서부터 소통에 대한 나의 '비트겐슈타인'적인 고정관념은 완전히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제3외국어’의 습득으로 소통에 대한 나의 생각이 새롭게 확장될수록 내 주변엔 따뜻한 이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